한줄 詩 3890

휘파람 여인숙 - 이기영

휘파람 여인숙 - 이기영 그 많은 입들은 다 어디에서 왔는지 그 많은 눈동자들은 또 어디로부터 시작됐는지 소문의 진원지는 아무도 모르는 배후를 가지고 있다 아무리 씹어도 질리지 않는 공용의 레시피가 있고 누가 묵었다 갔는지 아무도 관심 없는 이 허름한 소행성으로부터 입들은 더 은밀한 입들을 따라 빠르게 몰려들었다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어떤 표정도 없고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그러니까 소문의 배역에는 억울한 주연도 빛나는 조연도 없는데 한때의 통속일 뿐인데 모르는 척, 아는 척, 번쩍거리는 수많은 가면과 한 패거리가 되고 갈아타야 할 타이밍만 남은 비밀 아닌 비밀을 품은 허기는 허기에 닿지 못한다 구석진 방에 온갖 상상과 몸부림치는 비애를 낳아놓고 그 많던 타인들은 또 어느 다정함 속으로 사라졌는지 *시집..

한줄 詩 2018.01.16

미안하구나 내 추억아 - 윤석산

미안하구나 내 추억아 - 윤석산 시위를 떠난 우리의 젊음은 어둠의 과녁을 관통한 채 아직도 부르르 떨고 있구나. 떨고 있구나. 전신을 휘감던 내 슬픔의 갈기, 바다의 칠흑 속, 깊이 수장시키고 내 안의 빛나던 램프 아직도 당당히 빛나고 있구나. 관철동에서 혹은 소공동에서 또는 와이 엠 씨 에이 뒷골목에서, 웅숭이며 헌 비닐조각 마냥 서걱이며 나뒹굴던 우리의 빛나던 젊음. 그러나 오늘 술 마시고 고기 먹고 배불리어 이 길목 지나며, 아 아, 정말로 미안하구나 내 추억아. 어둠 속 빛나던 나의 램프여. 과녁을 향해 떠난 화살, 그 시위, 아직 부르르 내 안에서 떨고 있는데, 떨고 있는데...... *시선집, 견딤에 대하여, 시선사 지글거리고 싶은 중년의 - 윤석산 연탄불 위의 지글거리는 돼지고기가 먹고 싶다..

한줄 詩 2018.01.14

옛날 노새가 지나갔다 - 송찬호

옛날 노새가 지나갔다 - 송찬호 그는 앉은뱅이 키만 한 그 돌이 왜 독재자가 됐는지 끝까지 이해하려고 애썼다 하여 그는 마당에 돌을 끌어다 매몰차게 다 파묻진 않고 돌의 이마가 보이게 묻었다 그리고 그가 기르던 토끼의 자치 공화제 실험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실패의 상심으로 토끼들이 번번이 죽어 나갈 때 무정한 돌이여, 하고 마당에 나가 돌의 이마를 짚어보곤 하였다 그는 이제 소소한 일과로 하루를 보낸다 들에 나가 감자를 캐고 해바라기를 키우고 부서진 문짝이나 새는 지붕을 고치고 그러다 문득 가슴에 다시 이는 불을 끄다 생각해 보면, 좋은 시절은 이미 지나간 것, 아니, 아직 오지 않은 것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허리 둥치가 구부러진 버드나무 앞으로 느릿느릿 옛날 노새가 지나갔다 *시집, 분홍 나막신..

한줄 詩 2018.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