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못 믿을 세월 속에 - 고운기

마루안 2018. 1. 14. 12:47



못 믿을 세월 속에* - 고운기



섣달 늦은 밤, 눈이 내리고 가로등 비추는 길
새하얀 눈 위에 담뱃재
바둑이와 같이 간
어느 남자가 아니 어느 여자가
무슨 결심을 하던 중이었을까


아무 일 없이 해가 바뀌더니 강이 얼었다
유람선이 멈췄다
물길 오십 리
얼음을 따라 강변도로가
저도 얼어 눈물 보이는 아침


잡혀간 친구.... 이런 말 입에 올릴 일 더 없으리라 믿었는데
그 집 통장에 돈 넣을 일 더 없으리라 믿었는데


눈이 녹을 때
강이 풀릴 때


청청한 새벽이 올 때까지.... 이런 옛 맹세가 속절없다.



*최숙자가 부른 <영산강 처녀>에서.
*고운기 시집, 구름의 이동 속도, 문예중앙






흐미한 등불 밑에* - 고운기



살아가는 일의 곡절이 있어
때로 잠 못 이루는 밤과
때로 느꺼이 잠드는 밤이 번갈아 찾아왔었다


자주는 오지 마라, 곡절이여


깊이 사랑하지 못한 세상과 사람
미안하단 말일랑 하지 말라고
고맙지 않느냐고 가슴 펼 일 좀 하라고
떠난 사람은 내 귓가에 그렇게 남아 있다


산새가 털고 간 나뭇가지 끝에서 눈이 날린다



*황금심이 부른 <외로운 가로등>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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