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봉천동 파랑새 - 김응수

봉천동 파랑새 - 김응수 버스에서 내려 얼어붙은 보도를 미끄러지며 내려가면 연탄난로 모글모글 피어오르는 순댓국집 국물을 불며 소주를 나누어 마시면 시상만은 불길처럼 올랐다 포개지듯 드러누운 고만고만한 집들 사이의 약국 옆 주차장에 세 들어 살던 형 셔터를 열면 세상은 그만큼 열렸다 약국아가씨를 좋아하던 형은 아픈 데도 없이 박카스를 사오고 손잡이에 놓인 돌멩이를 치우곤, 간혹 거렁뱅이가 셔터를 올려 놀라곤 했다 여주인은 순댓국 푸기에 바쁜데 주인 남자는 소주를 들이키며 금달래 이야기를 했지 낙성대 입구에 살던 조금 모자라던 처녀 이놈, 저놈이 꼬드켜 아랫도리를 벌리더니만 떼기를 너덧 차례, 오늘은 어미가 못 참겠다며 배꼽수술 해버리고 왔다고 하는구만 소주 한잔을 마시고 교차로 쪽 둔덕을 미끄러지며 기어오..

한줄 詩 2018.01.19

만인은 법 앞에 억울하다 - 전대호

만인은 법 앞에 억울하다 - 전대호 그 봄날의 두 시간 동안 내가 어깨너머로 들은 바에 의하면 만인은 법 앞에 억울하다 친구를 면회하러 구치소에 가서 차례를 기다리던 그 봄날의 두 시간 동안 어깨너머로 들려오던 재소자 가족들의 대화를 간추려 보면 만인은 법 앞에 억울하다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그들이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런 책임감도 없이 지껄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못되 먹은 가축처럼. 그러나 그들이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법복(法服) 앞에서도, 단두대 앞에서도, 화형틀에 묶여서도 나는 억울하다고 일관되게 목 놓아 외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봄날의 두 시간 동안 나는 만인이 법 앞에 억울하다 하는 걸 들었다 세상은 살 만한 곳이 아니다 그들이 진실을 말하는 것이든 그들이 전부 거..

한줄 詩 2018.01.17

바위 닮은 여자들 - 이봉환

바위 닮은 여자들 - 이봉환 물기만 살짝 젖어도 반짝이는 조약돌이었던, 그 좋은 한때가 벌써 오래 전에 졸졸 흘러가버린 여자들 대여섯이 계곡물에서 텀벙댄다 나는 아들만 일곱을 낳았어 이년아! 일곱이면 뭘 해 영감도 없는 것이? 까르르 웃음보 터지고 물방울들 바위를 구른다 아직도 그렇게 반짝이던 생이 남아 있을라나? 바위를 닮은 여자들 가랑이 사이에 검푸른 이끼가 끼어버린 여자들이, 풍덩 뛰어들면 금세 거무튀튀해지는 바위들이 계곡에서 삼겹살에 상추쌈에 대두병 소주를 맛나게 마시고 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날리거나 말거나 아카시아 숲 속으로 꽃마차가 달리거나 말거나 보고 보아도 질리지 않는 바위들이 낮술에 취해 물속에 가랑이를 터억 벌리고 누워 있다 영감 그거 있어봤자 성가시기나 하지 뭘 해? 그래도 등..

한줄 詩 2018.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