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은하수 건너 서쪽 - 허림

은하수 건너 서쪽 - 허림 신발을 벗자 알루미늄 가루 쏟아졌다 불빛에 하얗게 반짝이는 미세한 입자들 은하수 같다 밤마다 은하수 건넌 적 있다 하루 종일 나사못 박다보면 내 몸도 나사처럼 어디론가 뚫고 들어가 움직이지 못할 때가 있다 창문이 하나 만들어질 때마다 하늘이 새롭게 열린다 은하수 건너편에서 오는 햇살이 막 창문 넘어선다 사월에 내리는 눈 아랑곳 않고 이미 꽃들은 피어 잠시 주춤거리는 사이 나사못이 손에 박힌다 여기저기 나사못이 박힌 몸이 노을처럼 붉다 창문 하나가 열린다 저녁 늦도록 가난한 이야기들 은하수 건너 서쪽으로 가곤 했다 *시집, 말 주머니, 북인 소한 - 허림 얼금뱅이 곰보가 사는 둑방길 감나무 밑을 지나가며 까치밥 바라본다 늦은 저녁 읍으로 가는 길이 조금씩 얼어붙어 미끄럽다 그 길..

한줄 詩 2018.01.22

산창(山窓) - 서정춘

산창(山窓) - 서정춘 산창에 물색 좋은 낮달이 떠서 옛집 봉창만큼 흰 그늘 서늘하다 거기 세 들어 살 것 같은 노자가 생각나서 누구 있소 불러본다 귀머거리 다 됐는지 반쪽의 여백만 기울둥했다 *시집, 귀, 시와시학사 가족 - 서정춘 어미 새 쇠슬쇠슬 어린 새 달고 뜨네 볏논에 떨어진 저녁밥 얻어먹고 서녘 하늘 둥지 속을 기러기 떼 가네 가다 말까 울다 말까 이따금씩 울고 울다가 잠이 와 멀다고 또 우네 어미 새 아비 새 어린 새 달고 가네 *시집, 귀, 시와시학사 묘비명 - 서정춘 -갈대 나는 늙으려 세상에 왔으나 이미 천년 전에 죽었다네 하늘 아래 서서 우는 미이라를 남기고

한줄 詩 2018.01.21

바람이 센 날의 풍경 - 강인한

바람이 센 날의 풍경 - 강인한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이다 플라타너스는 플라타너스대로 은행나무는 은행나무대로 바람 속에 서서 잃어버린 기억들을 되찾으려고 몸을 떨며 지느러미를 파닥거린다 흘러가 버린 저녁 구름과 매캐한 소문과 매연과 뻔한 연애의 결말들은 길바닥에 차고 넘쳐 부스럭거리는, 창백한 별빛을 이제는 그리워하지 않겠노라고 때 이른 낙엽을 떨군다 조바심치면 무엇하느냐고 지난겨울 싹둑싹둑 가지를 잘린 나무들은 눈을 틔우고 잎을 피워서 파닥파닥 할 말이 많은 것이다 할 말이 많아서 파닥거린다 춤을 춘다 물 건너간 것들, 지푸라기들 허공을 날아 높다란 전깃줄에 매달려 몸부림치고 소스라치는 저 검은 비닐들을 이제는 잊어야, 잊어야 한다고 빗금을 긋고 꽂히고 내리꽂히는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부러져 버린..

한줄 詩 2018.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