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미안하구나 내 추억아 - 윤석산

마루안 2018. 1. 14. 19:23

 

 

미안하구나 내 추억아 - 윤석산

 

 

시위를 떠난 우리의 젊음은
어둠의 과녁을 관통한 채 아직도 부르르 떨고 있구나.
떨고 있구나.


전신을 휘감던 내 슬픔의 갈기,
바다의 칠흑 속, 깊이 수장시키고
내 안의 빛나던 램프 아직도 당당히 빛나고 있구나.


관철동에서 혹은 소공동에서
또는 와이 엠 씨 에이 뒷골목에서,
웅숭이며 헌 비닐조각 마냥 서걱이며 나뒹굴던
우리의 빛나던 젊음.


그러나 오늘 술 마시고 고기 먹고 배불리어
이 길목 지나며,
아 아, 정말로 미안하구나 내 추억아.
어둠 속 빛나던 나의 램프여.


과녁을 향해 떠난 화살,
그 시위,
아직 부르르 내 안에서 떨고 있는데, 떨고 있는데......

 


*시선집, 견딤에 대하여, 시선사
 

 

 

 

 

 

지글거리고 싶은 중년의 - 윤석산

 

 

연탄불 위의 지글거리는 돼지고기가
먹고 싶다.
불 속으로 떨어지며 마지막 타오르는
기름의 발화, 그런게 그리운 것이 아니다.
다만 지글거리는 살점,
살점 위로 오가는 젓가락들의 살아 있는 행보(行步).
그들이 그리운 것이다.


(십여 년만에 그는 전화를 걸어왔다. 전화의 저쪽에는 십여 년 전의 그가 있는데, 사실은 십여 년 전의 그가 아닌데. 성큼 건너 뛴 십여 년의 세월이 조금만치도 생뚱이지 않는데. 그는 이내 중년의 음성으로 이렇듯 다가와 있을 뿐인데.)


세상은 결코 변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쪽을 향해 어깨들이 반쯤 기울어져 있을 뿐이다.
지글거리는 살점.
연탄불의 지글거리는 발화.


(십여 년만에 그는 비로소 전화를 끊었다. 끊기인 신호음만이 뚜뚜이며 십여 년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지워진 시간들, 시린 물살로 덧없이 밀려들어오고 있다. 오늘, 올 성긴 석쇠 위 한 점 살점으로, 아 아 문득 다시 지글거리고 싶다.)

 

 

 

 

# 尹錫山 시인은 1947년 서울 출생으로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197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 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바다 속의 램프>, <온달의 꿈>, <처용의 노래>, <용담 가는 길>, <적>, <밥 나이, 잠 나이>, <나는 지금 운전 중>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