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마네킹, 그 겨울 오후 1 - 김이하

마네킹, 그 겨울 오후 1 - 김이하 한 천년쯤은 흘렀겠지요 그래도 그날 오후는 따뜻했습니다 아마, 당신의 눈빛이 내 가슴에 꽂히는 이 순간을 기다리면서 살았을 나의 계절은 몇 번인가 옷을 벗고 알몸으로 휘청거렸을 테지만 여기서 더 가깝진 못했지요 그래요, 그건 당신이 알지요 한 천년쯤은 훌쩍 흘러갔겠지요 빈방으로 돌아가고 빈방에서 나오던 당신이 내게서 멀어진 시간들 그 밤, 훅! 하고 방안에서 끼치던 살 냄새 그건 당신이 벗어 던지던 몸의 세월이겠지요 누가 알겠어요, 발부리에 걸린 빈 술병들 혼자 울다가 뒹구는 어둠을 날카롭게 누군가 가슴을 찌르고 도망치던 뒷모습을 누가 알겠어요, 천년의 세월도 덧없었음을 그 겨울 오후 절벽의 어둠을 떨구고 이제 막 거리를 덮는 물결 누군가 돌아오고 있군요 그러나 나의..

한줄 詩 2018.01.08

모과가 붉어지는 이유 - 이강산

모과가 붉어지는 이유 - 이강산 그러니까 내가 이 골목을 고집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늦바람이 든 거다 곰곰 짚어보자면 바람은 생의 발단쯤에서 복선처럼 스쳐갔던 것, 절정의 뒤꼍에서 가으내 골목 힐끔대는 이 노릇이란 내게 휘어질 생의 굽이가 한마디쯤 더 남아 있는 탓이려니. 때도 없이 붉어지다 뼈가 부러진 옆집 대추나무 훔쳐보듯 은근슬쩍 바라보면 봉충다리 막냇누이의 봉숭아물 같은, 눈물 같은 선홍(鮮紅). 누군가의 연모 지우려 제 스스로 허벅지 찌르지 않고서야 저토록 노랗게 붉어질 이유가 없지 않느냐 늦바람이 든 거다 저도 나처럼 울긋불긋 바람의 단풍이 든 거다 *이강산 시집, 모항, 실천문학사 구절사 - 이강산 허물어진 산신각 터 벼랑 끝은 가을이다 벼랑 아래 가을은 어쩌다, 저토록 깊어서 손금 가늘고 빛..

한줄 詩 2018.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