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이력서 쓰는 아침 - 이용호

마루안 2018. 1. 15. 21:25



이력서 쓰는 아침 - 이용호



아직은 쉽사리 쓸 수가 없었다
여백의 칸칸 그곳이 언제나 비어 있음은
갑자기 결별을 통보해온 그녀의 무소식으로 알 수 있었다
걸어온 자리마다 길고 긴 정적의 숲으로 사라져
눈에 조명등 켜고 두 손으로 헤아려봐도
항상 두서너 개의 공란밖에 보이지 않았다
백지에 녹물을 털 때마다
밖에 내다 버린 시간의 잔해들
허기의 구름 속으로 다가오면
쉽사리 보이지 않는 자격증의 잔등마다
파랗디파란 구멍을 뚫으려 했다


너는 이다음에 뭐가 될래
누군가 낮은 소리로 기억의 창을 두들겼다
백지의 유혹은 아편 같은 몇 마디를 쓸어왔지만
이미 날린 무수한 암호에
아무도 눈 뜨려 하지 않았다
번들거리는 무지개 속을 일렁이며
부릅뜬 채 젖어 있는 몇 개의 과거가
사라지며 또 빛을 냈다


나도 한때는 무한한 허풍쟁이였다
침묵이 더욱 무거운 전율임을 알았을 때
손에 맺힌 땀방울도 식어만 갔다


날카롭게 잘린 종이의 허리가 일어섰다
나는 새벽의 벼랑에 이마를 깨며
가슴에 낫을 하나 꽂았다
펜을 들고 일어서면 끓어오르는
곧이어 바람에 실려 갈 멍든 이력들
축축한 손으로 퍼 올리면 비로소 놀라움에
낮은 나의 어깨가 들먹인다, 탐욕은
나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암석 같은 희망의 호각 소리만
이 지상에서의 말밥굽을 재촉하지만
하얀 모시에서 피어오르는 불꽃에
이제는 나를 태워야 할 차례였다.



*시집, 내 안에 타오르던 그대의 한 생애, 현대시학








퇴근의 추억 - 이용호



이제 영원한 퇴근이다
영원한 낮잠이다
한낮에 잠을 잔 게 실수였을까
밤에는 불면의 패잔병이 습기처럼 몰려온다
미친년 널뛰는 것 같은 빗소리를 새벽까지 듣다 창문을 열면
출근했던 기억들이 바닥에서부터 올라온다
출근한 게 언제였던가
고목의 뿌리처럼 단단하던 기억들을 이대로 캐낼 순 없다
아련했던 점심 식사의 냄새가 장명등처럼 빛난다
변실금 기저귀를 갈고 지하철 화장실 거울 앞에 서면
알아볼 수 없는 얼굴이 수척해진 채로 서 있다
아직은 살 만하다고 어제 죽은 친구 녀석보다 낫다고
카타콤처럼 지쳐 있는 지하철 통로는 길고 단단했다
동정 없는 세상에서
그동안 끊었던 담배를 미련 없이 한 대 피우고 싶은 밤에는
헤어진 아내로부터 문자가 날아오기도 한다
유방암 말기래요, 당신은요
어둠이 갉아먹은 하루에 묵묵하고 습한 달이 떠오른다
지하철 철로와 평행했던 추억이 들불처럼 일어난다
어머니의 몸에서 싹둑
탯줄이 끊어진 때처럼
이제 세상에 나 하나뿐이다
감각 없는 한쪽 팔을 들어
하늘에다 대고 삿대질을 한다
왜 하필 나였냐고, 나여야 했냐고
이제 영원히 퇴근이다
영원한 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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