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사막에 들다 - 이은심

사막에 들다 - 이은심 나를 쪼개고 쪼개면 한 알 쓰라린 모래에 닿으리 서둘러 내 안에 옮겨 심은 선인장 어린 싹 하나 일생의 죄가 무성해지려고 나는 자꾸만 물이 켜리 다시 오마 한 적 없는 이별을 재빨리 거쳐 고비나 사하라에 이를 때 한 다발 눈물은 왜 뭉쳐지지 않는가 꼿꼿이 태양을 받치고 선 나는 누구인가 진실로 우리는 서로 얼마나 먼가 그 물음을 굴리고 굴리어 가면 오직 둥근 가시관에 닿으리 *시집, 오얏나무 아버지, 한국문연 흐린 날 - 이은심 내 등뼈가 의자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평생 업고 다닌 나를 내려놓겠다고 하면 어쩌나 바람이 불 때마다 흐느끼는 목관악기 구멍에 아픈 사람 하나, 한 번뿐인 생을 이대로는 살 수 없다고 가출해버리면 어쩌나 나는 사랑을 무사히 횡재하고 싶어 떠돌던 백수 사교적인..

한줄 詩 2018.02.03

유년의 하늘 - 이상원

유년의 하늘 - 이상원 유년의 하늘을 새 한마리 가고 있다. 아무리 불러도 돌아보지 않는다. 이따금씩 벽돌담을 흔드는 아이들 소리거나 햇살이 튀는 솔바람소리라면 혹 모르겠지만 한번도 젖지 못한 내 목소리의 눈금으로 굳은 그 날개를 퍼득이게 하기는 어림없는 일이다. 정갈한 피 한방울로 거기까지 닿아서 굳은 목줄 풀리고 눈빛도 풀고 초록빛 뚝뚝 듣는 노래도 풀려서 한밤중 가문 뜨락에 비처럼 내리기는 천년 혹은 더 먼 후에도 어림없는 일이다. 유년의 하늘을 박제된 새 한마리 가고 있다. 눈 감으면 취중엔듯 지상의 동백잎이 한잎 반짝하고 빛난다. *시집, 지상의 한점 풀잎, 도서출판 경남 정월 대보름 - 이상원 내 어린 날 잘 타던 불꽃, 지금도 타던가. 마을 뒤 숲에서 왕대 찍어 상대 삼고 태깔 고운 짚단 위..

한줄 詩 2018.02.03

공연한 일들이 좀 있어야겠다 - 손택수

공연한 일들이 좀 있어야겠다 - 손택수 내게도 공연한 일들이 좀 있어야겠다 일정표에 정색을 하고 붉은색으로 표를 해놓은 일들 말고 가령, 태풍이 올라온다는 소식에 모종대를 손보는 노파처럼 곧 헝클러지고 말 텃밭일말정 흙무더기를 뿌리 쪽으로 끌어다 다독거리는 일 장맛비 잠시 그친 뒤, 비가 오면 다시 어질러질 텐데 젖은 바닥에 붙어 잘 쓸리지도 않는 은행잎을 쓸어담느라 비질을 하는 일 치우고 나면 쌓이고, 치우고 나면 쌓이는 눈에 굽은 허리가 안쓰러워 어르신, 청소부에게 그냥 맡기세요 했더니 멀거니 쳐다보곤 하던 일을 마저 하던 그 고요한 눈빛처럼 별 뜻도 없이 고집스레, 내 눈엔 공연한 일들에 노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상하지 않는가, 나는 이 쓸모없는 일들 앞에서 자꾸 부끄러워지는 것이다 세..

한줄 詩 2018.02.03

늙은 약사를 만나고 왔다 - 정윤천

늙은 약사를 만나고 왔다 - 정윤천 공음에 다녀오는 길에 면소의 약국에 들렀다 파리똥이 낀 선반에서 먼지 쓴 파스 상자를 더듬던 약사의 손길이 한참이나 더디다 초점이 먼 눈빛 너머로 건너다보이던 그의 날들이 느리게 느리게 거스름돈을 헤아리고 있을 때 어느 후미진 마을의 지명과, 그곳의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어깨를 겯고 저물어간다는 일이 때로는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이웃의 잡일로 공음에 한번 다녀와야 하는 경우가 되더라도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라는 듯 무심한 표정이었다 길가엔 가을꽃들이 피었다 그것들은 바람 속으로 약사마냥 느린 몸짓을 흔들어주기도 하였는데 수중에 카메라를 지니고 있었다면 잠시 길을 멈추고 흑백사진을 한 장 찍어두고 싶었다 허름한 모퉁이 다방, 구석진 자리에 걸터앉아 흑백사진 속에는 인화되지..

한줄 詩 2018.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