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겨울비 내렸을 뿐인데 - 강세환

마루안 2018. 2. 4. 19:53



겨울비 내렸을 뿐인데 - 강세환



겨울비 오는 날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를 살았다


한 번도 울리지 않는 내 휴대폰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있는 소파처럼
식탁과 마주 앉은 빈 의자처럼
혼기 놓친 여자 같은 계간지 표지처럼
뒷마당 대추나무 끝에 글썽글썽 맺혀 있던 빗방울처럼


옛 애인 같던 새벽녘 강릉 교동택지 맥줏집도
교항리 간선도로변 생맥주 카스타운도
꾸둑꾸둑 말린 장치찜 큰 축항 월성집도
찬 소주 곁들인 도루묵찌개 주문진 터미널 포장마차도


다만 겨울비가 좀 내렸을 뿐인데
겨울비도 나도 변명하고 있었다
너도 나도 서로 시절이 어긋났을 뿐이라고



*시집, 앞마당에 그가 머물다 갔다, 실천문학사








느지막이 오는 것들 - 강세환



이름도 성도 얼굴도 다른 쓸쓸한 것들이
이 늦가을 저녁
이 도시의 낙엽들과 함께 퇴근한다
쓸쓸한 것들은 다 느지막하게 온다
느지막이 느지막이 오는 것들


커다랗고 쓸쓸하게 생긴 낙엽이 또 집에 있었다
두 손으로 앙가슴께 움켜쥐고 있던
집사람은 쓸쓸한 낙엽 한 장 간신히 가리키듯
가슴께를 좀 밟으라고 하였다
가로수 아래 낙엽을 밟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사람의 가슴을 밟느냐고!


지난해 하얼빈에서 일행들과 함께
한 잎 한 잎 낙엽처럼 누워
중국 소수민족 여인들에게 발 마사지 받던 게 생각나서
가슴을 밟는 대신
집사람의 발바닥을 여기저기 주물렀다


오늘도 종종걸음으로 뛰어다녔을 집사람의 발바닥도
그 가슴께 못지않게 아플 것이다
발바닥은 본디 몸의 축소판이라 하였으니
발로 꾹꾹 밟으라는 가슴께도
여기 어디쯤일 것 같아
여긴가, 여긴가, 더듬더듬 발바닥을 주물렀다


집사람은 꼭 가슴께만 아픈 것도 아닐 것이다
발바닥을 주무르다 보니
낙엽 한 장이 내 가슴께 붙어 있는 것이다
쓸쓸하고 또 슬픈 것들은 다 가슴께 붙어 있다
느지막이 왔다가 가지도 않는 것들





# 이런 시를 읽으며 인생을 배운다. 호화인생이 부럽지 않고 삼류인생을 긍정하고 싶다. 어쩌면 내가 문맹이 아님을 이런 것에서
감사하게 생각한다. 글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글을 깨우쳐 준 이땅의 활자에 고마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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