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내 가장 나중의 일 - 문성해

마루안 2018. 2. 2. 22:02



내 가장 나중의 일 - 문성해



내 남은 생은 골목 깊숙한 가톨릭맹인선교회 같은 데서
사무장 같은 거나 하다 죽고 싶네
하루 종일 앉아 계시는 돌부처들 속으로
나 하나만 눈뜬 사람으로
눈뜨고 하는 일을 봐주다 가고 싶네


벌컥 연 화장실 문 안에
쪼그린 맹인 하나 발견하면
아무 말 않고 슬며시 문 닫아주고 나오겠네
아랫도리에 꾸들꾸들 달라붙은 설움 한 덩이를
나 죽을 때까지 입다물어주겠네


새벽까지 안마 일을 하고 온 내 맹인 친구가
희한하게도 날 알아보고 팔짱을 끼는 곳
아침이면 각지에 흩어져 사는
심봉사들 줄줄이 모여들고
어떤 바오로 씨는 라디오 같은 곳에 타박타박 점자를 잘도 쳐 보내서
상품권 같은 것도 쏠쏠히 받아 챙기는 곳


미용 봉사가 나오는 날이면
나도 얌전히 내 희어지는 머릴 맡기고
밥때가 되면
염전한 손들을 반찬 위에다 얹어주어야 하는 곳
눈 오는 날이면
줄줄이 굴비처럼 팔을 궤고 건너가는 우리를
차들은 멈춰 서서 한참을 기다리겠지


더듬이 같은 손들로 벽지는 쉬 더러워지고
지문으로 온 방은 번들거리지만
서로를 동물의 후각으로 알아채는 그곳
집에 돌아오면
나도 어느샌가 내 식구를 큼큼거리며 찾게 되겠지
극진히 살도 더듬게 되겠지


아침에도 깜깜한 그곳
부조처럼 앉아 있는 밤들 위로
환하게 낮을 켜주려 가고 싶네
내 늙어가는 감각을 등불처럼 켜 들고
오로지 눈뜬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로 그곳에 들면
날선 후각과 촉각들이 나를 더듬으려 오는 곳


어느덧 나도
향불이 흔들리듯
아득한 사람의 냄새를 맡게 되겠지



*시집, 밥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 문학동네








사나운 노후 - 문성해 



국민연금이나 그 흔한 저축성 보험 하나 없는 나를 두고 친구들은 노후 걱정을 해준다 노후 준비를 미리 해두는 센스 있는 그이들 앞에서 나는 대책 없이 막 사는 인간이 된다 짱짱한 노후 대책을 지닌 자들은 대체로 느긋하고 의젓하다 나는 그이들 앞에서 좌불안석. 미간에 주름이 지고 옹졸해진다 그이들은 먹는 것도 우아하게 쩝쩝거린다. 나는 먹는 것도 짭짭거려진다 나는 아무래도 대책 없이 늙어갈 것 같다 한편 이 대책 없음도 나쁘지 않겠단 불온한 생각이 드는 때가 있다 늙어 문단의 저잣거리에서 걸뱅이 짓을 하거나 퇴물 기생처럼 두 딸에게 얹혀 살다가 마지막엔 그마저도 내쳐져 어느 비루한 날, 남의 처마 밑에서 듣는 비나 우산 끝처럼 떨구다 죽어도 좋겠단 사나운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뭐가 될지 모르는 막연한 늙음을 으쓱거리며 기다려보자는 것이다 졸업 여행을 앞둔 청춘의 아이들처럼





# 이 시집에서 대표작을 고르라면 이걸로 하겠다. 망설이지 않았다. 읽으면서 딱 내 얘기라는 느낌이 감겨왔으니까. 희망을 가득 담은 긍정의 부정이 더욱 살고자는 마음을 다지게 한다. 이 별에 오기 전의 기억을 더듬는 시인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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