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늙은 약사를 만나고 왔다 - 정윤천

마루안 2018. 2. 2. 23:39

 

 

늙은 약사를 만나고 왔다 - 정윤천


공음에 다녀오는 길에 면소의 약국에 들렀다
파리똥이 낀 선반에서 먼지 쓴 파스 상자를 더듬던
약사의 손길이 한참이나 더디다
초점이 먼 눈빛 너머로 건너다보이던 그의 날들이
느리게 느리게 거스름돈을 헤아리고 있을 때
어느 후미진 마을의 지명과, 그곳의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어깨를 겯고 저물어간다는 일이
때로는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이웃의 잡일로
공음에 한번 다녀와야 하는 경우가 되더라도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라는 듯 무심한 표정이었다

길가엔 가을꽃들이 피었다 그것들은 바람 속으로
약사마냥 느린 몸짓을 흔들어주기도 하였는데
수중에 카메라를 지니고 있었다면
잠시 길을 멈추고 흑백사진을 한 장 찍어두고 싶었다
허름한 모퉁이 다방, 구석진 자리에 걸터앉아
흑백사진 속에는 인화되지 않을 빛깔, 연분홍 닮은
추억의 일들이며, 초록의 지난 시간들을
나도 느린 손길로 가만히 쓰다듬어보고 싶기도 했다

먼지 쓴 파스 봉투가 잘 뜯어지지 않아
한참이나 애를 먹었던 시간 속으로
늙은 약사는 흘러간 세월 같은 거스름돈 몇 닢을
천천히 건네주었다.


*시집, 구석, 실천문학사

 

 

 

 

 

 

모자를 하나쯤 - 정윤천


나와 함께 견디고 왔을 가난한 시간 위에도
하나쯤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잘 변하지 않던 습관에게도
하나쯤
햇볕에 그을려 자꾸만 늙어가는 목덜미에도 하나쯤
내 쓸쓸한 눈매라거나 이마 위에도 하나쯤

외양에는 별다르게 신경을 써본 일이 없던 나로서는
좀 엉뚱하게 여겨지기도 하는 지금과 같은
심경의 변화 위에도 하나쯤

예전과 같이 억지로 밀어붙이거나 힘으로는 말고
제법 이처럼 공손해진 손길과 마음으로
되도록이면 사뿐하면서도 폼이 나도록 하나쯤

정말로 주머니가 좀 헐렁해져도 좋으니
제대로 된 모자점에서 하나쯤

거울을 보기 위하여, 머리 한쪽을 벅벅 긁어 보이며
멋쩍은 표정으로 그 앞에 서보기도 하는
거기 비쳐 있는 너를 향해서도 하나쯤

굴렁쇠처럼 멀어져가는 세월의 뒷그림자에게도
손이라도 흔들어주는 마음같이
하나쯤,


 

 

# 정윤천 시인은 1960년 전남 화순 출생으로 1990년 무등일보 신춘문예 당선, 1991년 계간 <실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생각만 들어도 따숩던 마을의 이름>, <흰 길이 떠올랐다>, <탱자꽃에 비기어 대답하리>, <구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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