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시간의 윤리 - 김주대

마루안 2018. 2. 3. 18:50



시간의 윤리 - 김주대



내 안의 저녁들을 다 걷지 못했어도
지금은 더 깊은 밤으로 가야겠다
조개껍데기처럼 하얗게 굽은 어깨 위로 바람이 불 때
어두운 가등 아래 쪼그리고 앉아 부르던 노래
울음의 냄새가 피어오르던 뒷골목
뼛속까지 따라온 이름들을 버려야겠다
울며 부르던 노래는 남아
내가 떠난 뒷에도 저녁의 목청을 가다듬고
휘파람 불며 쓸쓸히 돌아다니겠지
가끔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이 그리워도
깜깜한 밤으로 가면
내 안의 깊은 하늘에 피부병 같은 별이라도 뜨려나
밤비 내려 한 열흘 고독의 창살에 갇힌 맹수처럼
붉어지는 눈이려나
생의 먼 데서 먼 곳까지 내 안의 저녁들을 다 울지 못했어도
이제 더 아픈 밤으로 가야겠다
남루한 도둑처럼 담을 넘다가
황급히 지나가는 별의 눈물을 맞는다



*시집, 그리움의 넓이, 창비








마주침 - 김주대



그토록 많은 흘러가는 인연들의 혼돈 속에서
하필 너는 왔다
충격이 이전의 나를 다 흔들 때
촉수를 내밀어 맞이한 해후
눈을 떠 처음으로 빛인 시선이 생겼고
벽을 통과한 마주침으로 너는 번식되기 시작했다
전염처럼 나를 무한히 이동시키는
해후는 진행형이었고 떨리는 현재였으므로
우리는 사랑했고 사랑할 것이었다
해후의 아래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고요한 징후
너를 눈치채기 위하여 뜬눈으로 새운 밤들을 지나
몰랐던 네가 스며드는 건
무섭고 희한한 일이었다
소문은 빠르게 몸 전체로 퍼졌다
피부와 속살들이 밤새 수런거리며
너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아팠다





# 김주대 시인은 1965년 경북 상주 출생으로 성균관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9년 <민중시>, 1991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꽃이 너를 지운다>, <나쁜, 사랑을 하다>, <그리움의 넓이>, <사랑을 기억하는 방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