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한 끼의 식사 - 김선

마루안 2018. 2. 4. 20:09



한 끼의 식사 - 김선



눈썹을 초승달만큼 그리다 말고 출근을 서두른다
밤새 술병 든 사연들이 아직 허공을 맴도든
가리봉역 광장에서 아침 식사를 하는 비둘기 두 마리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다
허기라는 이름으로 부끄러움을 감춘다
누군가 버려놓은 나쁜 습관들
더벅머리처럼 늘어져 버려진 욕설들
그들은 이런 식사에서 더 이상 놀라지도 않는다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는
그 밥상이 나를 빤히 쳐다본다
손바닥만 한 밥상에서 막 겸상을 끝낸 햇볕 무리가
행인들과 함께 지하도로 몸을 감추는 사이
느릿느릿 건너오는 불안한 시선
신호등 초록 숫자가 바뀔 때마다 잠깐씩 마주쳤으나
여전히 건너지 못한 채 아스팔트 위에서
반 토막 난 눈썹을 그리며 끼니를 때운다
제대로 그리지 못한 논썹을 닮은
비둘기들의 가난한 식사 같은
내가 교정을 보며 버린 활자들,
나는 활자들을 엮어 언어의 집을 만든다
작고 비틀거리는 생각들이 그 집에 들어선다
쓸모없다고 버린 활자와 책들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한 끼의 밥이 될 것이다



*시집, 눈뜨는 달력, 푸른사상








하현달 - 김선



달의 발바닥은 윗동네를 먼저 밟는다
불이 꺼진 동네에 달빛이 비치면
화려한 네온사인 뒤에 가려진 사연들 비로소 설 자리가 있다
낮달의 온기는 이미 시든 지 오래
한 발 비켜선 남구로역 인력시장엔
더는 출구가 없는지 오늘도 일찍 문이 닫혔다
알박기 한 상가들만 각이 진 어깨를 세우고 있는
이미 끝나버린 철거 자리엔
아직 집을 마련하지 못한 얼굴들이 누워 있다
깨진 그릇들의 반쪽 난 웃음이
낮추어 엎드려 있는 담벼락 굽은 등을 만져주고 있다
전깃줄 사이로 늦저녁 졸음을 졸고 있는 가로등
술집 여자들이 코로 웃는 웃음소리
저편에서 길고양이처럼 웅크리고 있는
달의 엉덩이를 만지기 위해
여자들은 가랑이 사이로 비단 거미줄을 친다
부풀어 분홍 커튼 속으로 사라지는 달빛
문틈 사이로 습하게 풍겨오는 아카시아꽃 냄새
발정 난 수컷들의 휘파람 소리
바람이 둥근 입술을 열고 빨아들인다
각이 진 지붕마다 기울어져 있는 달빛을
쓸어 담는 가리봉동 저녁
달의 종아리는 아랫동네에서 가장 얇다






# 우연히 손에 잡은 시집을 꼼꼼하게 읽었다. 좋은 시인을 발견한 기쁨이 크다. 안정된 호흡으로 행간에 담아낸 밀도 있는 시가 시인의 내공을 느낄 수 있다. 가리봉동에 대한 끈끈한 기억을 갖고 있는 시인의 본명은 김선자,, 9남매 중 한 사람이다. 오래전 내가 다닌 국민학교 교실 창가에 앉아있던 단발머리 소녀도 선자였다. 그때는 교실에 있는 여학생 다섯 명 중 하나는 영자, 경자, 미자, 선자 등이었다. 이름이 흔해서 친근한 김선자라는 이름을 가진 시인도 여럿이다. 김선 시인의 다음 시집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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