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징 - 육근상

징 - 육근상 징이여, 바람의 손잡이 잡고 등짝을 한번 후려쳐봐 울림이 클 탱께 아궁이 단속 심했던 대장장이가 벌겋게 달아오른 노을을 아흔아홉 번이나 구부렸다 폈다 만들어낸 걸작이 바로 저 강이여 동담티 무당 년이 찾아와 낚아채듯 뺏어간 날이 아마 그믐이었지 빨간 깃발 펄럭이고 아침저녁으로 울부짖는 소리 들리지 그 집이 몸땡이 풀어놓은 딘디 주인이 나이도 많고 고집불통인데다 말도 통하지 않아 맨날 굿판이 벌어지고 있지 내가 징이여, 소리에도 색깔 있어 울림 큰 음색이 특장인디 워쩌 오늘밤 한번 들어볼텨 징채라도 있으면 맘껏 후려쳐봐 이빨 꽉 깨물고 견뎌볼 탱께 *시집, 절창, 솔출판사 절창(絶唱) - 육근상 일흔 노인 소리를 듣는다 득음에서는 관악기 소리가 나는 걸까 하도 불어 속이 다 닳아버린 오죽(烏..

한줄 詩 2018.02.11

갑사 가는 길 - 이운진

갑사 가는 길 - 이운진 누구나 한 번은 길을 잃는다면 그래서 한 자리에 오래 서 있어야 한다면 거기, 서 있고 싶네 일주문 넘어가는 바람처럼 풍경소리에 걸음 멈추고 그곳에서 길을 잃고 싶네 산그늘 물소리 깊어져서 늙고 오래된 나무 꽃이 지고 꽃 피운 흔적도 지고 나면 말(言)까지 다 지우는 마음처럼 수만 개의 내 꿈들 떨구어 내는 일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저, 먼 길 끝나지 않았으면 *시집, 모든 기억은 종이처럼 얇아졌다, 문학의전당 고드름 - 이운진 눈물이 만들어지면 그 슬픔은 이미 장식된 것이다 다, 다 반짝인 것이다 *自序 10년을 세워도 허공 속이다. 제겨디딜 한 뼘 바닥도 없는 곳! 하지만 이 위태로움이 나를 지켜줄 것이다.

한줄 詩 2018.02.08

아버지를 숨기다 - 김점용

아버지를 숨기다 - 김점용 -꿈 71 산소통을 메고 사람들과 잠수를 한다 지하 물속에 납골당이 있다 세 사람은 유골을 여기저기 옮긴다 내가 유골을 꺼내자 플루트를 부는 연주자의 해골이 나오고 생전의 업적이 모자이크처럼 찍혀 있다 분명히 내가 아는 사람인데 기억이 안 난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해골 숨길 데를 찾는다 완전히 까발려지는 인생이 없듯 완전히 봉인되는 인생도 없다 아버지도 그럴 것이다 무덤만큼 뚜렷한 징표가 있을까 봉분 지주를 잡고 아버지를 묻을 때 힘주어 다졌다 선산의 솔이파리들이 바늘처럼 반짝였다 장례를 다 치르고 어머니는 가장 많이 울 줄 알았던 내가 눈물 한 방울 안 흘린다며 서운해하셨다 *시집, 오늘 밤 잠들 곳이 마땅찮다, 문학과지성 아버지를 바꾸고 싶어하다 - 김점용 ―꿈..

한줄 詩 2018.02.08

못 만나는 이별 - 김이하

못 만나는 이별 - 김이하 이제 가면 못 만날 거네 저물지 않는 사람의 들판 가득 낮달이 떠서 저물도록 농투사니 그림자 산 사람 등을 토닥거리고 사람의 집들 한 오라기 연기로 꿈적이고 땀내 비린 우리네 사는 아픔 거뭇거뭇 뒷산 장군 바위로 눕고 소식 없는 그대 생각 무장 얼크러져 아픈 등허리 뒤채네, 이 사람아 그대 간다면 가라 하였지만 나 몰라라 간다면 떠나라 하였지만 우린 이제 못 만날 거네 피고 지고 피고 지는 보리꽃 지고 낮달이 떠서 저물도록 내 그림자 넘실넘실 휘황한 사랑의 날은 저물어 어슴푸레한 기억 뒷산 장군 바위 아래 눕고 못 만날 거네, 이 사람아 이냥 가 버리면 우리 이 세상 시퍼런 5월 아니면 다시는 못 만날 거네 *시집, 내 가슴에서 날아간 UFO, 청파사 항문 외과에서 멈춘 歸路 ..

한줄 詩 2018.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