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저 능소화 마저 지기 전에 - 김일태

저 능소화 마저 지기 전에 - 김일태 -영월의 일기. 5 도계 너른 들판에 보리가 누렇게 파도치는 모양 보셨나요? 나도 한때 가슴에 삼복더위 일었던 적 있었지요. 내 육신 붉은 적을 버리고 나무그늘로도 식힐 수 없는 불덩이 같은 나를 팔뚝 굵은 사내에게 던지고 싶었던 적 주남의 너른 품 같은 사내 가슴에 오롯이 빠지고 싶었던 적 있었지요. 이 불같은 사랑의 가지 끝에 씨앗 하나 맺고 싶었던 적 있었지요. 열매를 기약할 수 없는 꽃이었지만요. *시집, 오동나무에 열린 새벽달, 불휘미디어 외로움도 약 삼아 - 김일태 -영월의 일기. 18 환갑을 넘기고 기억이 희끄무레해지면서 머릿속에 찍듯이 생각해놓은 것도 그냥 잊고 지나게 되네요. 살아있다는 것을 이리 깜빡깜빡 하는 만큼 서럽던 시절 기억도 쉬이 잊혔으면 ..

한줄 詩 2018.02.05

흔적에 대한 보고서 - 이철경

흔적에 대한 보고서 - 이철경 유년의 한쪽 모퉁이 흔적인 양 X- Ray에 선명하게 찍힌 폐렴의 상흔이 깊은숨을 헐떡인다 짧은 봄 햇살 아래 새끼 고양이처럼 처마 밑에 앉아 졸고 있던 아이는 또래의 하굣길을 바라본다 약으로 허기를 때우는 점심나절 담장 아래서 일어난다는 것 자체가 두려움이다 파란 하늘이 갑자기 캄캄한 암흑의 소용돌이로 아찔하던, 그 찰나의 빈혈은 차라리 희열이다 검은 터널의 겨울이 가고 가뭄에 허덕이던 어지럼증처럼 내 잠에 비가 내리면 세상은 그나마 이스트가 첨가된 빵처럼 부풀어 오른다 그 짧았던 계절에 미처 따라가지 못한 몸은 끝내 긴 밤의 뒤척임처럼 똬리를 틀었지, 새벽까지 멈추지 않던 기침과 눈알이 빠질 듯, 뼈 마디마디 풀리듯 내 깊은 불면의 밤은 납작하게 뼈가 굳어버린 꿈속을 표..

한줄 詩 2018.02.05

무작정 반하다 - 조항록

무작정 반하다 - 조항록 단지 몸짓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하지 마음을 빼앗기면 몸도 쇠약해져 그렇게 병들기도 하지 마음에만 마음을 바치는 게 아니라 몸도 아닌 한낱 몸짓 때문에 종일 물구나무 서기도 함을 그깟 몸짓에 갈팡질팡하며 견디는 게 객혈이기도 함을 굳이 흔들지 않아도 바람의 몸짓에 돌연 고백하는 종처럼 고요한 심경에 불쑥 쏟아져내리는 종소리처럼 *시집, 지나가나 슬픔, 천년의시작 잠시 쉬어가는 평화 - 조항록 의리에 살고 죽는 비디오 한국판 대부가 끝나고 조용필이 막간 가수다 음악이란 무릇 은혜로운 것 부산항은 쓰러진 건달들에게 손짓하고 나 역시 돌아갈 집 있음이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피곤함도 나름 짓누르지 못하는 신작로가 내다보이는 소읍의 다방 보리차가 끓고 있는 주전자에 설령 집어넣어도 흐들갑스럽..

한줄 詩 2018.02.05

밤 - 김유석

밤 - 김유석 -기차 갈 수 없는 곳을 가보려 함이 아니다. 가차이 두고도 한 번 들러주지 못했던 곳, 이후론 영 찾아가지 못하게 될 줄 모르는 이제는 어쩜 기차가 서지 않을지도 모르는 그 곳으로 밤차를 탄다. 겨울, 마음이 온통 새허여질 때까지 기다려 떠나는 기차에도 미처 태우지 못하는 것들이 있어 옆자리는 비고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실려가는 듯한 막연함이 성에 낀 차창에 긋는 어렴풋한 불빛 속으로 함께 데려가 달라고 눈송이처럼 뛰어드는 것들의 철없는 객기를 달래며 일부러 먼 길을 도는 세월은 아직도 남은 꿈이 있다는 것일까 지나친 후에야 환히 비춰지는 길의 부단한 이음새 위를 달리는 기차를 타는 사람들이 문득 아름다워 보인다. 하객이 없어도 질주하던 힘을 풀어놓고 가는 몇 몇 역이름을 외우면 ..

한줄 詩 2018.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