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불편한 관계 - 최규환

마루안 2022. 2. 15. 19:29

 

 

불편한 관계 - 최규환

 

 

신형 휴대폰을 쓰게 되었다
손가락에 마비가 올 정도로 연습을 해도 세상의 편의를 따라가지 못했다
글로벌 뱅킹으로 가입해 외국인으로 살 뻔도 했다
다음 생은
집 나간 아내가 뜬금없는 소식을 전해오거나
헤어지고 돌아오는 딸의 울먹임에 어쩔 줄 모르는 공중전화로 살고 싶었다
다음날도 그런 생각이 지워지질 않았다
버릇에 길들여지다 보면 습관이 되는 것인지
혹은 그 반대인지는 몰라도

다행스럽게 그때까진 이렇게 살아도 될 듯싶지만
안과 바깥 사이
그 너머를 꿈꾸는 덜떨어진 멍청이로 사는 게 좋아서

마음만으로 사는 일이 힘든 오후
세상을 앉히지 않은 오랜 누각처럼 둥둥 떠 있다가
네모진 무게 안으로 나를 넣어두려는 미련일지라도
어느 날 흐르는 강물의 찬찬한 넉살로 남고 싶어
행여, 라는 말에 잠시 울긋한 하늘도 열어보지만

글자 하나에 나를 담아두는 일조차
죽을 것처럼 힘들어
가끔은 손가락 사이로 불어오는 공기를 닫아버리곤 한다

 

 

*시집/ 설명할 수 없는 문장들/ 문학의전당

 

 

 

 

 

 

오래된 습관 - 최규환

 

 

기약 없는 것에 뭔가를 채우려는 것이 비일비재하다
가진 것 하나 없는 놈이
종이배 하나 띄워놓고 달마다 붓는 청약적금이 그랬고
희망이 없단 이유로 매주 로또를 산다는 옛 친구의 소박한 확률 너머
취업 문턱이 높을수록
쌓여가는 청춘의 무수한 밤이 그렇고
헤어지고 나서
그녀와 걷던 공원에 앉아 달빛만 안고 돌아오는 길에도
숱한 만남이었지만
사랑은 없는 것 같다던 김 대리의 말이

삼백예순날
봄이 올 것만 같다가도
마음만은 꽃이 될 수 없어
자주 길을 헤매었다

 

 

 

 

# 최규환 시인은 서울 출생으로 1993년 <시세계>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불타는 광대의 사랑>, <설명할 수 없는 문장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