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지구에서 만났다 - 류흔

마루안 2022. 2. 16. 22:36

 

 

지구에서 만났다 - 류흔

 

 

나는 지구에 온 사람

지구에 와서 동사무소에 등록을 했고

지구에서 아내를 만났다

지구에 와서 종일 중얼거리는 비를 만났으며

지구에 와서야 말없는 돌과

그보다 신중한 바위를 만났다

지구에 와서는 만나는 것들의 연속

목청 큰 천둥과 가시 공을 나에게 던지는

너도밤나무를 만났다

등을 둥글게 말아 엎드려뻗친 후

폭포 위에서 발광하는 무지개와

나처럼 지구에 온 사람 몇을 은밀히 만났다

많은 별 중에 내가 떠나온 별이

밤새 저렇게 울어왔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요즘 아내는 나의 정체를 눈치챈 듯하다

저녁에 자세히 씻지 않았으며

돌아누워 새벽까지 정숙하다

그러나 나는 예서 사람이 된 사람

지구에서 잔뼈가 굵은 아내를 위해

나는 기꺼이 체류를 결심했다

 

 

*시집/ 지금은 애인들을 발표할 때/ 달아실

 

 

 

 

 

 

소설 태양의 후예 - 류흔

 

 

태양의 후예가 누워있다

책갈피는 젖어 녹초가 되었고

누구도 태양의 후예를 거들떠보지 않는다

사막의 열기는 옛 영광,

너는 늘어뜨린 그것과 함께 욕실로 걸어가는

중년에 불과한 것이다

 

그림자를 거느린 사람과

그림자를 떼버린 자가 한데 섞여

분주히 오가는 대로에 너는 있다

비가 그쳤는데 하늘은 흐리고

오늘 아버지에게 다녀온 나도 흐리다

이를테면 아버지는 그림자를 떼어낸 사람,

병원에서 그것을 붙여보려 노력했는데

아버지는 끝내 태양의 저편이 되고 말았다

 

혜교와 중기의 결혼 소식을

아버지는 알고 있을까?

혜교의 팬으로서 화날 테지, 아버지는

중기 녀석쯤 한 방에 눕혀버릴 거야

중기는 의식이 없겠고

저기 흠뻑 젖은 채 널브러진 태양의 후예 한 권처럼

지난 독자의 후기나 되겠지

 

나는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태양의 후예를 주워 들었다

 

 

 

 

# 류흔 시인은 1964년 경북 안동 출생으로 200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을 받아 2011년 시집 <꽃의 배후>를 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지금은 애인들을 발표할 때>가 두 번째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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