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절망을 견디는 법 - 김명기

마루안 2022. 2. 18. 22:29

 

 

절망을 견디는 법 - 김명기

 

 

보증 서 준 친구가 야반도주를 하고

그 빚을 고스란히 떠안았다

 

구경해 본 적도 없는 큰 빚이 너무 억울해

배를 내밀어 보았지만 보증서에

핏자국처럼 선명한 날인이 말라 갈수록

점점 더 단단하고 큰 빚쟁이가 될 뿐이었다

 

통장에서 빚이 빠져나가는 날이면

세상 있는 모든 욕을 끌고 와

저주를 퍼부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억울한 마음이 짓무르고

삶이 수척해졌지만 신기하게

빚은 점점 야위어 갔다

 

몇 해 동안 빚을 다 갚고 나니

그제야 도망간 친구의 안부가 궁금했다

더 이상 빚이 빠져나가지 않는 통장과

세상 모든 욕과 저주는 할 일을 잃었다

 

더는 만날 일 없을 테지만 한동안 나는

네게 보내는 욕설과 저주의 힘으로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살았다

이제 나는 원래 그렇게 살던 사람 같다

 

어느 순간 우린 둘 다 절망이었을 텐데

너는 그 많은 욕과 저주를 어떻게 견뎠을까

 

 

*시집/ 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걷는사람

 

 

 

 

 

 

커피믹스 - 김명기

 

 

전력질주를 하며 살던 때가 있었다
서두르지 않아도 될 일을 서두르다
커피를 찢어 뜨거운 물을 붓고
마시는 것도 잊은 채 마냥 폭주했다
불안한 미래를 감추기 위해
저당 잡힌 육신을 돌려 막다 돌아보면
기다리다 지쳐 버린 커피가
테이블 데스처럼 쌓여 갔다
오래 알고 지낸 사람들과
철학서적과 생을 다독이던 시집 대신
집요한 매뉴얼과 실적서에
지쳐 버린 내가 세상에 없는 사람 같았다
잊은 채 식어 버린 커피처럼
차갑게 굳은 염한 아버지 얼굴을 만지고 나와
마시던 커피는 얼마나 뜨거웠던지
나를 잊어버리며 식어 가던 커피에는
아무런 노선이 없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더 이상 서둘러야 할 일을 서두르지 않고
가끔 뜨거운 물에 커피를 부으며
끝까지 친절하지 않았던

차디찬 아버지 얼굴을 곁들여 마신다

 

 

 

 

# 김명기 시인은 경북 울진 출생으로 2005년 계간 <시평>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북평 장날 만난 체 게바라>, <종점식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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