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하는 독백 - 강재남
저녁이 늦게 와서 기다리는 일밖에 할 줄 모르고 저녁이 늦게 와서 저녁 곁에서 훌쩍 커버릴 것 같았다
담장에 기댄 해바라기는 비밀스러웠다 입술을 깨물어도 터져 나오는 씨앗의 저녁
해바라기의 말을 삼킨 나는 담장으로 스며들고 싶었다 물기 없이 늙고 싶었다
저녁이 늦게 와서 내 말은 먼 곳으로 가지 못하고 아직 쓰지 못한 문장이 무거웠다 생의 촉수는 무거운 침묵으로 뿌리내리고
내가 나를 알아볼 때까지 등을 쓸어안아야 했다
꽃잎 떨어지는 소리가 눈동자에서 글썽이는 걸 알았다면 어떤 죄책감도 담아두지 마라 할 걸 말이 말이 아닌 게 되어 돌아왔을 때 여전히 침묵하지 마라 할 걸
저녁은 저녁에게 총구를 겨누고 저녁의 총구에서 검은 꽃이 핀다는 걸
저녁이 늦게 와서 알지 못했다 저녁이 늦게 와서 놀이 어느 쪽으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은하를 건너간 젊은 아버지 등을 떠올렸다
저녁이 늦게 와서 나비가 만든 지문을 해독할 수 없었다 핏줄 불거진 손가락에서 누설되지 않은 어둠을 끝내 당기지 못했다
*시집/ 아무도 모르게 그늘이 자랐다/ 달을쏘다
그것은 그러므로 - 강재남
어떤 여름과 마주쳤다 사육제 마지막 날이었던가 사순절 어느 일요일이었던가 기억을 더듬어 게르만족 마을이었던 것으로
신갈나무 그늘에서 니벨룽겐 노래를 불렀다 나는 어렸고 익살스러운 인형을 끌고 다녔다 안개가 나를 삼켰다
익살스러운 인형에게 뎅디트(Dengdit)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늘이라는 이름과 일치했다 비는 내리지 않고
살아있는 오늘은 살아서 오늘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내가 살아내는 방식은 늙고 쓸모없고 병들어가는 것
숲에서 물비린내가 났다 야생의 과일이 곪아가는 밤
사바나에 열여덟 번째 태양이 떴다
가문 장마였다
# 강재남 시인은 경남 통영 출생으로 2010년 <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이상하고 아름다운>. <아무도 모르게 그늘이 자랐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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