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진, 조금 먼 곳 - 심재휘
강릉여고 근처에 모여 동기들이 자취나 하숙을 할 때
그녀는 이른 아침 시외버스를 타고 매일 통학을 했다
시내의 머스마들이 주문진 출신을 두고
나릿가라고 놀리던 날이 있었다
강릉과 주문진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사이
세월을 따라 어떤 곳은 더 멀어지기도 하고
또 어떤 곳은 가까워져기도 했는데
명주군 주문진읍이 지금은 강릉시 주문진읍이 되어서
닿을 듯 닿지 않던 조금 먼 곳이 사라져버렸다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곳은 아주 먼 곳
조금은 멀고 조금만 가까워서 닿을 수 없는 곳
머리에서 바다 냄새가 나던 그 여고생은
말 한마디 못 붙여본 그녀는
가물거리는 그날의 주문진 조금 먼 곳이고
먼 곳과 가까운 곳만 남은 이제는
조금 먼 사랑은 사라졌다
*시집/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 강릉으로 가요/ 창비
안목을 사랑한다면 - 심재휘
해변을 겉옷처럼 두르고
냄새나는 부두는 품에 안고
남대천 물을 다독여 바다로 들여보내는
안목은 한 몸 다정했다
걸어서 부두에 이른 사람이나
선창에 배를 묶고 뱃일을 마친 사람이나
안목의 저녁에 서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바람의 방향은 밤과 낮이 달랐다
그때마다 묶인 배는 갸웃거리기만 했다
모든 질문에 다 답이 있는 게 아니었다
여기가 물이 끝나는 곳인가 물으면
그저 불을 켜고 저녁을 보여주는 안목
묻는 건 사람의 몫이고
밤바다로 떠나가는 배를 보여주기만 하는 안목
우리가 삶을 사랑한다면
안목에게 묻지를 말아야지
불 켜진 안목을 사랑한다면
천천히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잊지 말아야지
# 심재휘 시인은 1963년 강원도 강릉 출생으로 1997년 <작가세계>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적당히 쓸쓸하게 바람 부는>, <그늘>, <중국인 맹인 안마사>, <용서를 배울 만한 시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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