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빨간 잠 - 천수호

빨간 잠 - 천수호 그녀의 아름다움은 졸음에 있다 빳빳 헛헛헌 날개로 허공을 가린 저 졸음은 겹눈으로 보는 시각의 오랜 습관이다 '아름답다'라는 말의 벼랑 위 붉은 가시 끝이 제 핏줄과 닮아서 잠자리는 잠자코 수혈받고 있다 링거 바늘에 고정된 저 고요한 날개 잠자리의 불편한 잠은 하마, 꺾이기 쉬운 목을 가졌다 아름다움은 저렇게 알면서도 위태롭게 졸고 싶은 것 등이 붉은, 아주 붉은 현기증이다 오래 흔들린 가지 끝 저기 저 꿈속인 양 졸고 있는 등이 붉은 그녀 그녀의 아름다움은 위태로움에 있다 *시집, 아주 붉은 현기증, 민음사 저 고운 가루에는 - 천수호 화장터까지 따라왔지만 저 고운 가루에는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밀가루 같기도 하고, 화장분(化粧粉) 같기도 한 그것은 고열(高熱) 속에서 너무 많이 ..

한줄 詩 2018.03.11

적멸 - 김광수

적멸 - 김광수 나의 혁명은 하릴없이 술잔 속을 배회하는 정열 허기진 저녁에 잉걸불로 타올라 속 쓰린 절망을 헛구역질하네 희망이라는 망념은 물속의 달처럼 움켜쥐면 농염하게 일그러져 깔깔거리며 나를 희롱하네 더러 들불 같은 연애도 있었지만 매양 검은 폐허였네 홍수 뒤 찢어진 쇠꼬챙이 잔해들이 혈관과 관절을 들쑤시었네 봄이 오면 꽃그늘에 앉아 낙화분분에 취하고 만산홍엽에는 내 몸도 핏빛으로 붉어지리 아리아리아리랑스리스리스리랑 *시집, 비슷비슷하게 길을 잃다, 문학과경계사 상락(常樂) - 김광수 이순(耳順)이 아니라 이명(耳鳴)이 온다 죽은 짐승과 썩은 물고기로 창자를 채우고 바닷물로 목을 적시며 아무도 본 적이 없는 낡은 신화책 속의 괴물들을 향하여 바늘도 없는 낚싯대를 천 년 간 드리웠구나 토끼의 뿔과 거..

한줄 詩 2018.03.10

방랑자의 넋두리 - 이철경

방랑자의 넋두리 - 이철경 포커라 호수 옆 찻집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생각했네 한참이 지난 후, 지금 이 순간을 그리워할 거야, 라고 그 한참이라는 시간이 경과 후 사진을 보며 그때를 생각하네 과거 속 박제된 사진 속에 스며 있는 그 기억을 그리워할 거라고, 그때 당신과 함께라면 만년설이 쌓인 히말라야 눈 속에 묻히더라도 핼복할거라 생각했었지 때로는 죽음이 현실보다 아늑하다고 불현듯 생각하면서 훗날 또,,,, 오늘을 그리워하나니 그래서 더 나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나니. 죽음은 그리워하지 않아도 어차피 오는 것. *시집, 죽은 사회의 시인들, 천년의시작 패배자 모임 - 이철경 키 작은 패배자 셋이 우연을 빙자한 모임에서 오십 넘어선 구차한 내력을 서로 끄집어내어 서로 핥고 있다. 그 시절..

한줄 詩 2018.03.10

빗물에 손을 씻다 - 박순호

빗물에 손을 씻다 - 박순호 갈퀴가 된 손가락을 빗물에 담근다 꽃잎을 쓸어모으는 부드런 갈퀴가 아니다 낙엽글 긁어 불태우던 갈퀴도 아니다 늦도록 쌓인 벽돌이 밤새 단단한 벽으로 서고 모르타르처럼 굳어가는 손가락 빗물에 풀어진다 한 켜 한 켜 곧게 쌓아올린 벽돌 한 장 되지 못했던 헝클어진 젊음 저의 키보다 높이 쌓고도 다 못 쌓아 집에 돌아오는 저녁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사이로 고약하기 짝이 없는 노동이 부서져 내린다 가지런히 쌓아야 할 내일이 있음에도 연장과 함께 비에 젖어 두 손을 뺄 줄 모르고 담뱃불로 문신을 지운 팔뚝들 본다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을 가진 시퍼런 혈기왕성한 독수리 육체를 이탈한 사악한 날개가 연장 가방 속에 숨으려다 은빛 도구에 두 번 살해되는 골목길 아무 일 없듯 점잖고 평화롭게 손..

한줄 詩 2018.0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