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빨간 잠 - 천수호

마루안 2018. 3. 11. 18:49

 

 

빨간 잠 - 천수호


그녀의 아름다움은 졸음에 있다

빳빳 헛헛헌 날개로 허공을 가린 저 졸음은
겹눈으로 보는 시각의 오랜 습관이다

'아름답다'라는 말의 벼랑 위
붉은 가시 끝이 제 핏줄과 닮아서
잠자리는 잠자코 수혈받고 있다

링거 바늘에 고정된
저 고요한 날개
잠자리의 불편한 잠은
하마, 꺾이기 쉬운 목을 가졌다

아름다움은 저렇게
알면서도 위태롭게 졸고 싶은 것
등이 붉은, 아주 붉은 현기증이다

오래 흔들린 가지 끝
저기 저 꿈속인 양 졸고 있는
등이 붉은 그녀

그녀의 아름다움은 위태로움에 있다


*시집, 아주 붉은 현기증, 민음사


 

 



저 고운 가루에는 - 천수호


화장터까지 따라왔지만
저 고운 가루에는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밀가루 같기도 하고,
화장분(化粧粉) 같기도 한 그것은
고열(高熱) 속에서 너무 많이 바스라진 것이다

물기 많던 그녀의 슬픔도
고운 가루가 되어
미처 빻지 못한 뼈들 사이 누워 버린 걸까

서로 눈멀어 가라앉게 했던 앙금들이
저기 저 한 옴큼의 가루라면
빚진 마음으로는 차마 손 내밀 수 없는 것

아무래도 저 고운 가루엔
손이 가지 않는다
만지면 청맹과니 된다는
부나방의 비늘 가루처럼 그녀는 누워 있다
손이 닿지 않았지만 눈먼 배웅이었다


 


# 천수호 시인은 1964년 경북 경산 출생으로 명지대 대학원에서 문예창작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아주 붉은 현기증>, <우울은 허밍>이 있다. 여성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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