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물 속의 사막 - 기형도

물 속의 사막 - 기형도 밤 세시, 길 밖으로 모두 흘러간다 모두 금지된다 장마비 빈 빌딩에 퍼붓는다 물 위를 읽을 수 없는 문장들이 지나가고 나는 더 이상 인기척을 내지 않는다 유리창, 푸른 옥수수잎 흘러내린다 무장한 옥수수나무,,,, 나는 천천히 발음해본다 석탄가루를 뒤집어쓴 흰 개는 그해 장마통에 집을 버렸다 비닐집, 비에 잠겼던 흙탕마다 잎들은 각오한 듯 무성했지만 의심이 많은 자의 침묵은 아무것도 통과하지 못한다 밤 도시의 환한 빌딩은 차디차다 장마비, 아버지의 얼굴이 떠내려오신다 유리창에 잠시 붙어 입을 벌린다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 우수수 아버지 지워진다, 빗줄기와 몸을 바꾼다 아버지, 비에 묻는다 내 단단한 각오들은 어디로 갔을까? 번들거리는 검은 유리창, 와이셔츠 흰 빛은..

한줄 詩 2018.03.09

사우나실 모래시계 - 주창윤

사우나실 모래시계 - 주창윤 피곤한 어제의 하루를 벗겨내기 위해서 사우나실은 아침부터 북적거린다. 찌그러진 바퀴들은 무거운 성기를 이끌고 들어와서 열심히 팔굽혀펴기를 하고 어젯밤의 구토도 땀을 빼며 내장을 비워낸다. 모래시계가 완전히 비워지는 십 분 동안 모두 다 낡은 육체의 배터리에 충전한다. 전능의 누구도 저렇듯 지친 영혼을 빠르게 회복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脫骨된 바퀴들은 마디마디 기름칠되고 스패너로 조여져서 하루 동안의 구원을 받은 후 다시 찌그러지고 구토하기 위해서 씩씩하게 밖으로 나간다. *시집, 옷걸이에 걸린 羊, 문학과지성 사우나실로 가는 달마 - 주창윤 달마의 선방(禪房)도 들어서면 숨이 막혀왔을 것이다. 내 몸의 일부를 비워내는 것은 종교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이다. 이마에 수건을 묶고 투..

한줄 詩 2018.03.08

콩이 구르는 이유 - 김시동

콩이 구르는 이유 - 김시동 아주 멀리 도망가는 것을 미리 염두에 두고 어른이 될 때까지 문 꽉 걸어 잠그고 문고리 부서지는 그날을 기다리는데 자랄수록 멀리 도망갈 궁리만 하는 콩들에게는 이유가 있어서이다 매끄러운 옷이고 둥글둥글한 몸이다 보니 멀리 굴러가기 좋다 야무지게 태어난 것을 감사히 생각하면서 내게도 삶이 있는 한 아무에게나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마음껏 멀리 굴러가 자수성가해서 새로운 살림 차리며 번식하고 싶은 것이 콩이 구르는 이유다 *시집, 눈물은 나의 연봉, 문학의전당 불혹 - 김시동 알람이 온몸으로 요동을 치면 혼이 퇴근해서 육체로 출근이다 동공 침대에 매일 출근하는 달 눈곱 생산하고 집으로 퇴근이다 새벽이 출근할 때 오장육부도 출근을 한다 아파트 갓등이 눈에 불을 켜고 막바지 철야 작..

한줄 詩 2018.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