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저녁 풀내음 - 김창균

저녁 풀내음 - 김창균 옛 사람들은 풀이 썩으면 반딧불이 된다고 했던가 늦은 가을 저녁 들판에 누워 별들을 본다. 이승의 삶이 깊어져 저렇게 푸른 별로 뜬다는 것이 왠지 낯설기도 하여 자꾸 별들을 바라보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마지막까지 푸른빛으로 가기 위해 살아 있는 동안 죽도록 푸르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들판의 풀들이 모두 썩어 가을 하늘 별로 뜨는 저녁 그 푸른 저녁 위에 나를 포게 놓으며 또 이런 생각도 해보게 되는 것이다 마른풀 냄새 맡으며 나도 그렇게 며칠 동안 푸르게 나이가 들었으면 그랬으면 하는. *시집, 녹슨 지붕에 앉아 빗소리를 듣는다, 세계사 그믐밤 - 김창균 삼십 촉 알전구가 어둠을 밀어 내는 저녁이다 이 시간에는 늘 그래 왔듯이 늙을 대로 늙어 주름이 살처럼 굳어 버린 얼굴..

한줄 詩 2018.03.16

그 풀밭 버섯 피워 내듯이 - 오두섭

그 풀밭 버섯 피워 내듯이 - 오두섭 한 살이라도 더 먹는 건 아무래도 섭섭한 일 저 어린 것들 무른 눈동자 촐망촐망 영글어야 하고 새벽 밝고 한낮 뜨거워 저녁이 오면 별들 하늘에서 광년으로 내달려와 그 눈 속에서 빛나야 하고 새끼 나무들 건방지듯 쑤욱쑤욱 자라나 성성한 잎 단단한 팔다리 근육 키워서 바람과 새와 달과 별들의 둥지 아름답게 지어야 할 일이고 내가 옹기마냥 구부러지며 흙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는 건 그늘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는 건 좀 쑥스러운 일이겠지만 병상에 누워 약효 키우는 투병의 숨결에 고목 가장 깊은 상처에서 움트는 재생의 씨앗에 열병에 몸 빼앗겨 황홀하게 빠져든 몽유병에 또 그것을 기다리는 모든 것들에게 깊이 찔러볼까, 시간의 주사바늘 무심히 다니는 그 길섶에 누워 있다가 반..

한줄 詩 2018.03.16

무명에 들다 - 허림

무명에 들다 - 허림 내 머리 위로 북두칠성이 떴다 어둠이 저 별을 내게 보내준 것이다 놀이 지고 저녁이 왔는데 그가 오지 않았다면 나는 사막처럼 메마름이나 목마름으로 내내 걸어야 했으리라 아니 저녁이나 밤이란 말 쓸 줄 모르고 내 눈을 감아 무명을 밝혀야 했을 것이다 지금은 그러나 여든의 엄마와 상추 뜯어 보리밥에 감자 으깨어 쌈을 먹고 평상에 누워 아득했던 꿈을 뒤적이다가 내 이마 위로 돋아나는 별들을 바라보다가 별들의 이름을 부르다가 어떤 별에게는 친구의 별명을 붙이기도 하다가 산협 막치미에서 군불을 때며 어린 애인이 중얼대는 서귀포 바람 이야기 떠올리다가 소처럼 웃으며 머리 들 때 내 이마에 와 부딪치는 캄캄한 개구리 울음 같은 어둠 이보다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 또 있는가 가만가만 그 품에 안기는..

한줄 詩 2018.03.16

황혼의 엘레지 - 서규정

황혼의 엘레지 - 서규정 멀리 사라져간 하늘은 불타올라 잿보라로 날리는 마을은 이제 쓸쓸하다 가을, 다치고 다치고 뒤덮인 계절은 늙은 반장님 뒤통수에 나뭇잎으로 붙어서 성질을 버럭 내고 달겨드는 햇살과 싸워 누렇고 질긴 힘줄만 만들어 놓고 간다 이 세상 모르는 것이 없는 바람과 싸워 죽으면 다행이겠다 너무 오래 자란 손톱은 부르르 떠는 허리를 더듬고 가슴을 붙들고 일어서려 한다 한번만 나를 놓아다오 목메이는 겨울산 메아리들을 다 불러 이른 봄날 무수한 나비떼로 날릴 때에 설매화 설움 꽃가지로 나는 나를 찾으리 *시집, 황야의 정거장, 문학세계사 잠깐만의 사랑 - 서규정 짧디 짧은 넥타이를 매고 기웃기웃 날아다니다 월급날은 잠깐잠깐 사랑할 수 있었다 조퇴 한 번이 까진 이번 달 월급은 고장난 신호등처럼 딱..

한줄 詩 2018.03.16

흔들거리는 목소리의 슬픔 - 박석준

흔들거리는 목소리의 슬픔 - 박석준 '살아온 만큼의 아름다움', 예전엔 목소리로 떨구었는데, 요즈음엔 뇌리에 새겨지는 말이다. 생각은 너무도 쉽고 편하지만 말 한마디는 얼른 건네지 않는 20대! 하여 사람들은 늘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40대에 이르면서 돈, 한 사람의 삶의 흐름을 얽어버린, 비의 몸짓이 되게 한다. 돈 없음과 돈 있음, 부족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따라다닌다고 생각했지만, 돈 없는 갈등과 번민은 사람을 구속하고, 사람을 사람으로 있지 못하게 한다, 실존하지 못하게 한다. 회색의 거리가 가끔 사람의 비틀거리는 길을 껴안는다. 실존의 순간들을 실존의 욕망으로 변하게 한 것은 비가 사람 곁에 너무 가까이 다가왔을 때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비는 없다. 그저 잘 흘러가려는 사람이 따로 있을 뿐이다..

한줄 詩 2018.03.16

떠돌이의 기준 - 이용헌

떠돌이의 기준 - 이용헌 ​ ​ 첫째 항성 주위를 끊임없이 공전할 것 둘째 충분한 질량과 중력으로 공 모양의 형태를 유지할 것 셋째 공전 궤도에서 가장 지배적일 것 ​ 첫째 여성 주위를 끊임없이 공전할 것 둘째 충분한 물량과 완력으로 창 모양의 형태를 유지할 것 셋째 도전의 궤도에서 가장 지배적일 것 ​ 첫째 남성 주위를 끊임없이 벗어나려고 할 것 둘째 충분한 아량과 매력으로 하트 모양의 형태를 유지할 것 셋째 응전의 궤도에서 가장 지배적일 것 ​ ​ 첫째 대상의 주위를 끊임없이 배회할 것 둘째 충분한 주량과 체력으로 사람 모양의 형태를 유지할 것 셋째 딴전의 궤도에서 가장 지배적일 것 ​ 나는 별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면서 무한대공을 떠도는 당신을 생각한다 ​ 첫째도 없고 둘째도 없는 시작도 없고 끝도 ..

한줄 詩 2018.03.16

그래서 너는, 그래서 나는 - 홍성식

그래서 너는, 그래서 나는 - 홍성식 가진 것 없이 태어나서 그래서 너는, 가난한 부모 밑에서 학대와 협잡만을 보고 배우며 자랐다 커 가면서도 똑똑치 못했던 그래서 너는, 선생들의 조롱과 따귀를 독점하며 학교를 저주했다 덜렁 불알 두 쪽 개뿔도 못 가진 그래서 너는, 마흔이 다 되도록 주간지 여배우 비키니에 늙은 정액 튀도록 수음(手淫)이나 했다 머리에 서리는 내리고 힘 빠진 무식한 영감 그래서 너는, 촌구석 국가보조 양로원 골방에서 누구도 슬퍼하지 않는 죽음을 맞았다 대여 받은 웃음으로 누구보다 세련되게 떠벌이며 비생산적인 말장난에 미혹당하였고 예쁜 마누라와 지나치게 똑똑한 아이들을 둔 길거리에서 이쪽을 가리키는 몇몇 손가락 그 거짓 명성에 취해 그래서 나는, 이따위 짓 버리지 못하고 창녀의 간밤 시세..

한줄 詩 2018.03.15

눈물이 비눗방울이 되는 능력 - 이기영

눈물이 비눗방울이 되는 능력 - 이기영 울음을 가진 아름다운 자세는 눈물이라는 고결한 태도에 닿아 있다 눈물이 팽창하는 비애의 방식으로 공중을 천천히 차오르며 출렁거릴 때 울컥, 한 방울로 완성될 때 슬픔이라든가 면역에 대해서는 짧은 호흡으로 말할 수 있지만 그리운 이름은 입 안 가득 고여 입술을 떠나지 못한다 심장 저 깊숙한 곳에 묻어두었던 첫 번째 고백, 더 단단히 둥글게 말아 올리는 자세를 고집하고 다정한 체온이 건너가지 못하는 슬픔은 저 혼자 깊어져 주저앉기도 한다 눈물이 터지기 직전까지 울음이 아니다 그래서 참는다는 말의 장력은 긴 떨림이다 주저하는 입술 혹은 수백 번의 고민 끝에 발자국 소리 없이도 떨어져 나온 이름들이 공중에서 천천히 가벼워진다 마침내, 눈물은 길게 호명된 이름으로 투명해져서..

한줄 詩 2018.03.15

바다의 완력은 당해낼 수 없다 - 강신애

바다의 완력은 당해낼 수 없다 - 강신애 ​ 여관 강변장은 성당 같다 입구의 청동 인어상을 나는 마리아라고 부른다 묵주 대신 커다란 소라를 쥔 한 손은 하늘로 뻗치고 한 손은 자신의 음부를 가린 半神半魚의 마리아 헤드라이트 불빛이 터진다, 찔린 듯 경련하는 조각상 비늘이 꽃처럼 떨어진다 녹색의 개가 비늘을 뒤적거리고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취객 하나, 난산의 안개가 연인의 긴 그림자를 끌고 강변장으로 스며든다 나직하고 끊길 듯한 목소리로 나를 불러낸 이 누굴까 이 밤, 조각상 앞으로 내가 해 떨어진 아스팔트 길 위에서 중생대의 숲을 그리워할 때 상처를 따라가듯 아무도 모르게 성호를 그어보일 때 강변장 입구를 뭇시선으로부터 차단한 나무들이 이파리를 동그랗게 모으고 속삭인다 널 환영해, 여기부터 古典이야..

한줄 詩 2018.0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