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똥을 베껴 쓰다 - 정일근

마루안 2018. 3. 10. 19:34



똥을 베껴 쓰다 - 정일근



시외버스 공중화장실 쪼그리고 앉는 변기에
누군가 쓰고 간 간단한 일 획 읽었다


얼굴 붉어지도록 힘주지 않아도
발 저리도록 오래 견디지 않아도
쓰윽, 단숨에 사람의 몸속에서 빠져나왔을
몸의 뜨끈뜨끈한 일부


한 치 흐트러짐 없이 써내려간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한ㅡ자


저 거침없는 쾌도난마!


오래 쪼그리고 앉았지만 몸의 문 쉽게 열지 못하는
오래 곤궁하였지만 마음 문 쉽게 열지 못하는
속 좁은 나를, 대오 쾌활하게 하는 똥이여


읽을수록 아랫배까지 시원해지는 똥의 문장 앞에
나는 부러워 손바닥에 몇 번씩이나 베껴 쓰며
얽히고 막힌 길의 시작을 찾는다



*시집,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문학과지성








나의 고래를 위하여 - 정일근



불쑥, 바다가 그리워질 때 있다면
당신의 전생(前生)은 분명 고래다


나에게 고래는 사랑의 이음동의어
고래와 사랑은 바다에 살아 떠도는 같은 포유류여서
젖이 퉁퉁 붓는 그리움으로 막막해질 때마다
불쑥불쑥, 수평선 위로 제 머리 내미는 것이다

 
그렇다고 당신이 고래를 보았다고 말하는 것은 실례다


당신이 본 것은 언제나 빙산의 일각
누구도 사랑의 모두를 꺼내 보여주지 않듯
고래도 결코 전부를 다 보여주지 않는다


한순간 환호처럼 고래는 바다 위로 솟구치고
시속 35노트의 쾌속선으로 고래를 따라 달려가지만
이내 바다 깊숙이 숨어버린 거대한 사랑을
바다에서 살다 육지로 진화해온
시인의 푸른 휘파람으로는 다시 불러낼 수 없어


저기, 고래! 라고 외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사랑에 빠졌다


고독한 사람은 육지에 살다 바다로 다시 퇴화해 가고
그 이유를 사랑한 것이 내게 슬픔이란 말 되었다


바다 아래서 고래가 몸으로 쓴 편지가
가끔 투명한 블루로 찾아오지만
빙하기 부근 우리는 전생의 기억을 함께 잃어버려
불쑥, 근원을 알 수 없는 바다 아득한 밑바닥 같은 곳에서
소금 눈물 펑펑 솟구친다면
이제 당신이 고래다


보고싶다,는 그 말이 고래다
그립다,는 그 말이 고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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