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깊고도 가벼운 상처 - 김정수

마루안 2018. 3. 10. 19:06



깊고도 가벼운 상처 - 김정수



밭을 매다 보면
미처 파내지 못한 돌멩이를 만날 때가 있다
언젠가 영역 밖으로 밀려날 운명임을 알면서도
흙의 멱살 꽉 그러쥔 채 놓아주지 않는다
겉으로 드러낸 부분만으로도
얼마나 환한 상처인지 알 수 있지만
어둔 햇빛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있다
파면 팔수록 더 깊이 제 모습 드러내는,
내 가슴에도 단단히 박힌 상처 하나 있다
늦은 밤 취기에도 풀어 놓지 못하는, 그래서 더
사랑은 재미없는 게임이었을 게다
일방적으로 끌려가다 맥없이 지고 마는, 그래서 더더욱
내 삶에 관중을 끌어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텅 빈 객석의 유희조차 즐기지 못하고
아직까지도 먹먹한 가슴에 상처 키우는,


돌멩이 하나 파낸 자리
밭의 배꼽 같다



*시집, 하늘로 가는 혀, 천년의시작








망대 - 김정수



사람에게 기대고 싶은 날에는
춘천에 갈 일이다 약사동 망대에 오르기 전
기대슈퍼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늙은 햇살에게
흘러간 길을 묻고 문득 해몽을 들을 일이다
오래 한자리를 지키는 부모의 자식들이란
다 대처로 흘러가 슬픈 구름이 되고
전신주인 양 우뚝 솟은 자식 자랑이 눈물로 해작거리거든
선한 눈 마주하며 낮술 한잔 기울일 일이다
언덕을 닮은 술잔이 자꾸 미끄러지거나 길이
길을 잃는 순간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꽃들이 화분거리는 골목으로 접어들 일이다
길은 집을 낳고 혼자 열병을 앓던 문 앞의 서성거림일랑
막 언덕에 올라온 우편배달부에게 내어주고


효자동 혹은 봉의산 너머 그 어디쯤에서
무장공비인 양 검은 연기 피어오르거든
가을이보다 사납게 짖어 대는 망대에 오를 일이다
약사동 낮은 창문들 일제히 포신을 치켜세우면
언덕 아래로 하산하며 쯔쯔쯧 혀를 차는 늙은 호기심
키 작은 담장 위 철조망에 감긴 하늘이
고추잠자리의 그늘을 골목에 풀어 놓을 즈음
백기처럼 흔들리는 옥상의 빨래에도 인사를 건넬 일이다
공지천 건너 평지의 발가락들 우두둑 꺾어지는 소리에
약사경로당 범람하던 무용담이 전깃줄처럼 촘촘해지고
한순간 소식이 끊긴 폐가가 늘어날수록
기침 소리도 잦아들고 길에 묻어 사는 평상 같은 기억들
사람에 기대 홀로 낮아지는 지붕에 걸리고


길은 점점 좁아져
사람이 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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