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석양에 바친다 - 김신용

마루안 2018. 3. 10. 18:40



석양에 바친다 - 김신용



해가 질 때, 가슴에 구멍이 뚫리는 사람은 혹시 죄 많은 사람?

그렇기야 하겠냐마는, 그래도 해가 질 때 가슴이 텅 비는 사람이 있다

그 구멍 혹은 허공을 메우기 위해 우리는 들판에서 꽃을 찾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다리미로 식빵을 구워먹는 사람도 있다

집의 벽에 그림을 거꾸로 걸어놓는 사람도 있다

물론 눈에 보이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있기에 존재하는 것이지만

혹시 전시장에 변기를 거꾸로 걸어놓는 사람도 가슴에 구멍이 뚫리는 사람?

그러면 저 할머니의 포즈는 어떤가? 들에서 캐온 돌미나리 몇 단

쑥 몇 줌 앞에 놓고 장이 설 때마다 장터 귀퉁이에 쪼그려 앉은

오늘은 뭘 가지고 나오셨나? 문득 쳐다보게 하는 표정

어떤 날은 과수원 바닥에 떨어진 낙과 몇 알을 주어와, 어김없이 앉아 있는 그 포즈-

지나치는 사람들이 이거 맛 들었어요? 하고 물어도, 발그라니

이제 막 물들기 시작하는 복숭아빛깔 같은 낯빛만 떠올리는

혹시 무안해 할까봐 일부러 모르는 척 지나쳐도

표정은 여전히 이물질 하나 섞여 있지 않은, 그 도화빛이어서

아, 가을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빨리 가을이 와- 밤알들이

도토리 은행알들이 나무에서 수북이 떨어졌으면 좋겠다, 싶게 만들어

혹시 저 할머니도 해가 질 때 가슴에 구멍이 뚫릴까? 싶지만

그 뼈의 가지에서 寒苦鳥 한 마리 날아오르지 않는, 표정이 좋아서

오늘은 문득 해가 질 때, 저 얼굴의 꽃 한 송이 떠올리고 싶어진다

저렇게 닭처럼 씨를 뿌리지 않아도 풍성히 수확을 하고 있는 듯한

세상과 불화의 이물질이 조금도 섞여 있지 않은, 저런 무균질의 웃음이 있다면!



*시집, 바자울에 기대다, 천년의시작








寒苦鳥들 - 김신용

-저녁의 노을에 비치면 모든 것이 유혹적인 향수의 빛깔로 나타난다. 단두대까지도!  <밀란 쿤데라>



저녁의 가지에서 후두둑 날아오르는 한고조들을 본다

언제 내 뼈의 가지에 내가 물방울로 맺혔나?

집 짓지 않는 새들의 궤적이 飛蚊 아니, 飛紋 같다

한때 내게도 집은 짓지 않아도 가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의

발레 같은, 경쾌한 발걸음이 있었다

그것은 <아, 어떡하면 입맞춤을 '뜨겁게' 할 수 있지?> 하는

눈빛처럼, 길의 가지에 맺혀 있었다. 그 길의 끝

일몰 속에 서면 마치 백조의 마지막 울음이 가장 사무치는

울음이듯 노을이 번져 흘렀지만, 그 노을이

집을 짓지 못하는 이의 피눈물인지는 아지 못했다

그런데 언제 저 뼈의 가지에 저들이 물방울로 맺혔나?

내 집을 허물지 말라며 망루 위에서 몸무림치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날아오르는

한고조들을 본다 이미 박제가 된 줄 알았는데,

박제가 되어, 기억의 창고 혹은 사무실의 책상 밑에서 먼지나 뒤집어쓰고 있는 줄 알았는데

솜으로 채워진 내장에서 톱밥 같은 의식이 부스러져 내려도

나사로 조립된 날개에서 삐걱이는 기계음이 들려도

저렇게 살아서 날아오르다니! 그 궤적이 飛紋 아니, 飛蚊 같다

혹시 저 새도 자신이 걸어온 눈 먼 길들의 알람이 되고 싶었던 것일까?

자신이 날아오르는 순간이 가장 아름다운 비상의 순간인 듯이?

가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의 발레 같은 그런 경쾌한 춤의?

아, 어떡하면 입맞춤을 뜨겁게 할 수 있지? 하는 그 눈빛처럼?

거꾸로 세워놓으면 끊어졌던 시간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모래시계처럼?





# 세상 보는 눈이 깊지 않으면 보지 못하는 시인의 치열함과 지성이 느껴지는 시다. 飛蚊과 飛紋이 교차해서 들어간 두 단어에 주목한다. 중년에 접어들어 찾아간 안과에서나 쓰지 일상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기에 단어라기 보다는 한자 조합이라 해야겠다. 왜 시인은 祕文도 아니고 鼻門, 非文, 碑文도 아닌 비문으로 한고조들의 슬픔을 노래했을까. 추우면 피해 있다 더울 때 나타나는 모기의 궤적으로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집이란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임을 절실하게 보여주는 시로 해석한다. 노을이 집을 짓지 못하는 이의 피눈물이라는 걸 한고조가 말해주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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