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적멸 - 김광수

마루안 2018. 3. 10. 20:17

 

 

적멸 - 김광수

 

 

나의 혁명은

 

하릴없이

 

술잔 속을 배회하는 정열

 

허기진 저녁에 잉걸불로 타올라

속 쓰린 절망을 헛구역질하네

 

희망이라는 망념은

물속의

달처럼 움켜쥐면 농염하게 일그러져

깔깔거리며 나를 희롱하네

 

더러

들불 같은 연애도 있었지만

매양

검은 폐허였네

홍수 뒤 찢어진 쇠꼬챙이 잔해들이

혈관과 관절을 들쑤시었네

 

봄이 오면 꽃그늘에 앉아

낙화분분에 취하고

 

만산홍엽에는

내 몸도 핏빛으로 붉어지리

 

아리아리아리랑스리스리스리랑

 

 

*시집, 비슷비슷하게 길을 잃다, 문학과경계사

 

 

 

 

 

 

상락(常樂) - 김광수

 

 

이순(耳順)이 아니라 이명(耳鳴)이 온다

 

죽은 짐승과 썩은 물고기로 창자를 채우고

바닷물로 목을 적시며

아무도 본 적이 없는

낡은 신화책 속의 괴물들을 향하여

바늘도 없는 낚싯대를

천 년 간 드리웠구나

 

토끼의 뿔과 거북의 털*로 만든 찬과

자갈로 지은 밥을 버리리니

 

버린 자리에

앉으면 꽃자리**

서 있으면 별자리

 

꽃도 별도

멸종한 기억과

뿌리 없는 꿈속에 서식하지 않는다

 

-아무리 반복되어도 좋다 이 끔찍한 삶***

 

끔찍한 것뿐 만이랴

지금 여기 그대로 빛을 받은 모든 사물들이

현상과 회로를 바꾸며

흘러갈 뿐

 

이명이 곧 이순이다

 

 

*토각구모兎角龜毛: 능엄경에서 부처님이 제자 아난다에게 自我의 실재여부를 규명하는 과정에서 드는 비유.

**구상의 시 <꽃자리>

***독일 철학자 니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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