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멸 - 김광수
나의 혁명은
하릴없이
술잔 속을 배회하는 정열
허기진 저녁에 잉걸불로 타올라
속 쓰린 절망을 헛구역질하네
희망이라는 망념은
물속의
달처럼 움켜쥐면 농염하게 일그러져
깔깔거리며 나를 희롱하네
더러
들불 같은 연애도 있었지만
매양
검은 폐허였네
홍수 뒤 찢어진 쇠꼬챙이 잔해들이
혈관과 관절을 들쑤시었네
봄이 오면 꽃그늘에 앉아
낙화분분에 취하고
만산홍엽에는
내 몸도 핏빛으로 붉어지리
아리아리아리랑스리스리스리랑
*시집, 비슷비슷하게 길을 잃다, 문학과경계사
상락(常樂) - 김광수
이순(耳順)이 아니라 이명(耳鳴)이 온다
죽은 짐승과 썩은 물고기로 창자를 채우고
바닷물로 목을 적시며
아무도 본 적이 없는
낡은 신화책 속의 괴물들을 향하여
바늘도 없는 낚싯대를
천 년 간 드리웠구나
토끼의 뿔과 거북의 털*로 만든 찬과
자갈로 지은 밥을 버리리니
버린 자리에
앉으면 꽃자리**
서 있으면 별자리
꽃도 별도
멸종한 기억과
뿌리 없는 꿈속에 서식하지 않는다
-아무리 반복되어도 좋다 이 끔찍한 삶***
끔찍한 것뿐 만이랴
지금 여기 그대로 빛을 받은 모든 사물들이
현상과 회로를 바꾸며
흘러갈 뿐
이명이 곧 이순이다
*토각구모兎角龜毛: 능엄경에서 부처님이 제자 아난다에게 自我의 실재여부를 규명하는 과정에서 드는 비유.
**구상의 시 <꽃자리>
***독일 철학자 니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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