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빗물에 손을 씻다 - 박순호

마루안 2018. 3. 10. 19:52

 

 

빗물에 손을 씻다 - 박순호

 

 

갈퀴가 된 손가락을 빗물에 담근다

꽃잎을 쓸어모으는 부드런 갈퀴가 아니다

낙엽글 긁어 불태우던 갈퀴도 아니다

늦도록 쌓인 벽돌이 밤새 단단한 벽으로 서고

모르타르처럼 굳어가는 손가락

빗물에 풀어진다

한 켜 한 켜 곧게 쌓아올린 벽돌 한 장 되지 못했던

헝클어진 젊음

저의 키보다 높이 쌓고도 다 못 쌓아 집에 돌아오는 저녁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사이로 고약하기 짝이 없는 노동이

부서져 내린다

가지런히 쌓아야 할 내일이 있음에도

연장과 함께 비에 젖어 두 손을 뺄 줄 모르고

담뱃불로 문신을 지운 팔뚝들 본다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을 가진 시퍼런 혈기왕성한 독수리

육체를 이탈한 사악한 날개가 연장 가방 속에 숨으려다

은빛 도구에 두 번 살해되는 골목길

아무 일 없듯 점잖고 평화롭게 손을 씻는다

그의 불룩한 안주머니 속에는 병든 아내를 위한

약 한 첩이 따뜻하다

 

 

*시집, 다시 신발끈을 묶고 싶다, 문학마을사

 

 

 

 

 

 

新도시 - 박순호


아파트 공사장에 걸린 석양이 계단을 타고 내려온다
도시 중심 밖 스러지는 고운 석양을 따라
귀가를 서두르는 사람들
나의 수족(手足)이었던 낡은 자동차를 세워 두고
관절염을 앓는 내 왼쪽다리를 믿고 싶다
저만치 하루종일 수심으로 가득찬 김 씨의 처진 어깨에
걸터앉은 남루한 황혼
이제 나도 말하고 싶다
영혼이 가장 선량한 순간과 배고픔을
앞서가는 사람의 등에서
나의 등을 바라보는 다른 얼굴에서 사이사이를 채운,
명찰  달고 줄지어 선 아파트 단지
모두가 쉽게 집에 찾아가고 또 모두가
외로운 손을 내린 채 말이 없다
자동차 안에 두고 온
아날로그 손목시계의 초침이 나의 방향과 어긋나고
휴대폰의 벨소리는 주인을 잃은 지 오래다
사방은 아스팔트와 콘크리트와 검은 가로수
거기에 머문 표정이 검은 잎으로 쌓이고
그 쓸쓸함 뒤로 나는 밤새 몸살을 앓는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적멸 - 김광수  (0) 2018.03.10
방랑자의 넋두리 - 이철경  (0) 2018.03.10
똥을 베껴 쓰다 - 정일근  (0) 2018.03.10
깊고도 가벼운 상처 - 김정수  (0) 2018.03.10
석양에 바친다 - 김신용  (0) 2018.0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