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명인 - 육근상

명인 - 육근상 손바닥으로 읽는 소리북만큼이나 울림 큰 서적이 또 어디 있으랴 쇠가죽 단단히 동여맨 소리북통 덜렁 메고 수림으로 들어와 관절 굳어버린 사내 북채 쥐고 쓰러져 죽기를 원한다 침엽의 바람 오롯이 받아낸 식솔들이 무거운 저녁 짊어지고 들어와 밥상머리 숟가락 달그락거릴 때 천복 씨 뭉뚝하게 굵은 손가락 펴 소리북통 가죽끈 힘 있게 당겨본다 오늘 무슨 날인가 소리북통마저 바람 새고 천복 씨 문지방 장단 맞추는데 밖에 유성기음반복각판 긁는 듯 바람이 따그락 손장단 읽으며 지나간다 *시집, 절창, 솔출판사 북 - 육근상 까맣게 타들어간 것이 비비면 한 줌도 안 되겠다 퀭한 두 눈에 밟히는 소쿠리며 망태기 바람벽 기대선 지게 작대기 하나에도 눈시울 붉다 작달막하지만 탱자나무 북채 닮아 눈빛 푸르고 걸음..

한줄 詩 2018.03.14

할아버지 신발 - 배정숙

할아버지 신발 - 배정숙 끝물 인생이 웅크리고 앉은 요양원 신발장 절룩거리던 노역에 주석으로 단 마지막 반려의 기록이다 어스름 저녁에 장지문을 닫고 허름한 날개 한 쌍 비상의 각도를 조절하여 이제 피안까지의 거리는 몇 마장이나 될지 훠이훠이 날아와 정리한 슬픔의 깊이가 허방 한 줄 언제 다시 그와 포갤 수 있을지 지루한 자유가 형벌이 되는 하루하루가 소태맛이다 자투리 기억 속 황홀한 구속의 날들 목 빼고 바라보는 저 기다림 한 켤레 위를 암갈색 그림자가 덮어쓰기 한다 하루에 한 번씩 들르는 쇠잔한 노을빛이 잠시 신었다 벗어놓은 한 마디 유언 하얀 고무신이 고요하다 *시집, 나머지 시간의 윤곽, 시로여는세상 노인요양원 203호실 - 배정숙 어제도 막차까지 기다리는 동안 당신의 무대 위로 어느새 낯선 어둠이..

한줄 詩 2018.03.14

밑 빠진 독 - 정선희

밑 빠진 독 - 정선희 어릴 적 나의 꿈은 두꺼비 한 마리 키우는 것 털이 복슬복슬한 강아지도 아니고 고양이도 아니고 두꺼비 한 마리 키우는 것, 만지면 우둘투둘 미끄덩거리는 두꺼비 한 마리 커다란 독 안에 넣어놓고 먹이를 주는 것 그놈이 자라서 구멍을 메우게 하는 것 아버지, 처음부터 밑 빠진 독이었다 물을 부으면 돈이 줄줄 새어나갔다 아무리 부어도 독은 차오르지 않고 어머니 점점 지쳐갔다 삐걱거리는 자전거 뒤에 아모레 화장품 가방을 싣고 집집마다 골목마다 다니던 어머니, 입에서 노래가 끊기고 웃음이 끊기고, 나는 우등상을 타고 밥을 하고 청소를 했지만, 어머니 여우비처럼 웃었다 나는 두꺼비를 기다렸다 내 힘으론 어림도 없어 두꺼비에게 희망을 걸었다 털이 없는 얼룩덜룩한 두꺼비 한 마리 키우고 싶었다 ..

한줄 詩 2018.03.14

근심의 진화 - 김이하

근심의 진화 - 김이하 나는 알지 못했다 저까짓 세간살이 하나가 커다란 무덤으로 가슴을 누룰 줄 냉장고며 세탁기며 자잘한 물잔 하나까지도 이제는 버리지 못할 내 몸의 일부가 되어 지쳐 가는 줄 그렇게 한 풍경이 되어 있는 줄 나는 몰랐다 갑자기 승냥이 '응앙응앙' 우는 산골이 그리워지는 겨울 밤 온몸이 가려워 오는 열화가 잠의 줄기를 걷어 내고 어쩌면 이렇게 멍해지는 생일까 싶어 울음을 누르고 세상의 처음에 선 듯한 쓸쓸함에 겨를도 없이 앉은 밤 내가 어떻게 왔는가 들여다보자니 기억의 거울은 까맣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그 길 끝처럼 찰나에 풍경을 버리고 까마득하다, 승냥이 울음에 귀만 먹먹하다 그러다 까무룩 죽어가는 삭정이 하나 눈에 밟힌다 지나간 자국을 남기고 돌아오면 낯익은 세간들만 빼곡히 들어선 ..

한줄 詩 2018.03.13

외로움에 대하여 - 배홍배

외로움에 대하여 - 배홍배 먹감나무 꽃이 졌습니다 나무는 이미 어두워졌고 사람의 말로 중얼중얼 더 캄캄해지다가 눈물 같은 까만 열매들을 글썽입니다 말을 더듬는 아이가 나무를 쳐다봅니다 어린 열매 하나가 머뭇머뭇 숨 끝에 끌립니다 순서 없이 몸속의 구멍들이 입 밖으로 막힌 아이의 울음은 나무의 그늘이었을까요 인적처럼 서 있는 늙은 감나무 아래는 오래된 저녁이 인기척으로 오는군요 그렇군요 사람의 흔적과 자리를 바꾸고 사람을 향해 복받쳐 오르는 나무의 나이테 수 십 년이 지나서야 그렁그렁 울음에 닿았군요, 그랬었군요 *시집, 바람의 색깔, 시산맥사 별어곡역 - 배홍배 빈 대합실에 앉아 있다 의자도, 흔한 사진 한 장 없이 문 하나만으로 한세상인, 휑뎅그렁함이 섭정하는 대합실 매표구가 있던 벽에 벽돌 하나가 튀..

한줄 詩 2018.03.13

초원의 별 - 신경림

초원의 별 - 신경림 -몽골에서 닥지닥지 하늘에 붙은 별무리에서 낮게 떨어져내려온 저 별에 나 같은 사람 또 하나 살고 있나보다, 평생을 두고 해온 일 문득 부질없어 그 허전함 메우리라 이 먼 나라까지 와서도 이번에는 그것도 부질없어 저녁 한나절을 낮잠으로 보내는 나를 한밤중에 몰래 불러내는 것을 보면. 듬성듬성 초원에 핀 꽃들을 보게 하고 조랑말처럼 초원에서 뒹구는 날렵한 두 처녀 활기찬 웃음소리를 듣게 하는 것을 보면. 외진 장터에서도 후미진 산속에서도 찾지 못했던 나 같은 사람 또 하나 저 별에 살고 있나보다, 모든 걸 버리리라 이 먼 나라까지 와서도 아무것도 버리지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는 나와 밤새 동무가 되어주는 것을 보면. *시집, 낙타, 창비 이역(異域) - 신경림 저 굵은 주름투성이 늙은..

한줄 詩 2018.0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