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연속극처럼 - 이규리

마루안 2018. 6. 11. 21:32

 

 

연속극처럼 - 이규리


베토벤 월광이 좍 깔리면
저 드라마 속 남녀는 이별하게 돼 있다
누구나 다 안다
그런데 따지기 시작한다
누가 먼저 사랑한다 했으며
누가 먼저 헤어지자 했는지를,
차일 것 같으면 먼저 차라고 일러준 건
언니다,
그런 언니도 예외 없이 차였고
베토벤 월광이 깔릴 틈 없이 내 드라마도 종쳤다
홧김에 길섶 둥근 호박을 걷어찼다
데그르 굴러갈 줄 알았는데
움푹 패이더라, 하현이더라
드러나지 않을 뿐, 남녀는 만날 때부터
서로 파먹고 먹힌다
드라마가 특히 그렇다
비벼 치대는 동안은 모르겠지만,
엿기름도 가라앉고 나면 웃물만 쓴다
시작은 끝을 물어오고
하현이 가까워지면
다시 한번 베토벤 월광이
남녀의 분위기를 쓰윽 잡아준다
서로 날을 들키는 순간, 황급히 감추는 순간
하현이다.
자욱하게 하혈이다

 

*시집, 뒷모습, 랜덤하우스

 

 

 




알고보면 - 이규리


사랑하는 사람이 침묵할 때
그때의 침묵은 소음이다
그 침묵이 무관심이라 여겨지면
더 괴로운 소음이 된다
집을 통째 흔드는 굴삭기가 내 몸에도 있다
침묵이자 소음인 당신,
소음 속에 오래 있으면
소음도 침묵이란 걸 알게 된다
소음은 투덜대며 지나가고
침묵은 불안하게 스며든다
사랑에게 침묵하지 마라
귀찮은 사랑에게는 더욱 침묵하지 마라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건너편에서 보면 모든 나무들이 풍경인 걸
나무의 이름 때문에 다투지 마라




*시인의 말

끌어모은 이삭들,  
말(馬)안장에 얹어 보낸 뒤 바퀴 자국을 살펴보니
말(言)을 따라간 것들 거의가 뒷모습이다.
뒷모습엔 눈물이 배어 있다.
묵묵히 견딘 시간들이 함께 있다.
그 측은한 모습들을 베끼고 옮겨보았으나
말(馬)은 없고 말(言)만 많으니 그 수레 또한 멀리 가진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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