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살 맛 - 고증식

마루안 2018. 6. 11. 21:36

 

 

살 맛 - 고증식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자고
맛있는 거나 좀 먹자고
장소 메뉴는 날더러 정하라는데
장소는 그렇다 치고
암만 뒤적거려도 맛있는 게 뭔지
땡기는 게 없으니
어디 사무치는 얼굴인들 있겠나
중학교 때 읍에 따라가
처음 먹어본 짜장면 한 그릇
개울 건너 약방집 은순이
고 가시내 하얀 얼굴만큼이나
삼삼하게 아른거리던 그 맛
어느 토요일 오후였던가
이십 리 타박타박 읍냇길 걸어
꿈같은 짜장 한 그릇에
날 저물어 돌아오기도 했는데
그런 집 어디 없나
몇 십리 자갈길 달려가 만나는
사무치는 그리움 하나


*시집, 하루만 더, 애지출판


 

 



내 친구 왕별 - 고증식


친구가 별을 달았다
한낮에도 빛나는 크고 우뚝한 별
그를 왕별이라 부르는 건
별밭에 내리는 출세가 부러워서는 아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붙어 다닌 것도 모자라
군대까지 따라간 질긴 인연 때문도 아니다
우리가 아는데 그에게는 빽이 없다
아무리 서발장대 휘둘러봐도
장군은커녕 부대 근처 일가 빽 하나 없다
고등학교 때 눈두렁 베고 돌아간 아버지와
평생 흙 고랑에 청춘을 묻어버린 어머니
교복에 매달리던 어린 세 동생이 전부였다
졸지에 가장을 짊어진 그가
대학도 던지고 삼사를 간 건 당연했다
삼십 년을 쌓아올린 피 묻은 별
우리는 그 별에서 서늘한 푸른 눈물을 본다
노력이 별 달아주는 건 아니라는 이 땅에서
언 땅을 비추는 햇살의 뿌리도 본다
우리들 어깨 위에도 별이 뜬다는 걸 보여준
그래 네가 진짜 왕별이다



 

 

# 고증식 시인은 1959년 강원도 횡성 출생으로 충남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4년 <한민족문학> 추천으로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환한 저녁>, <단절>, <하루만 더>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