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산다는 것은 모두 닮은꼴이다 - 정충화

산다는 것은 모두 닮은꼴이다 - 정충화 여덟혹먼지거미란 놈은 제가 놓은 덫에 걸린 곤충을 잡아먹고 그 주검으로 은신처를 꾸민다 내용물을 빨아먹고 난 껍데기 그 빈집들로 가짜 나뭇잎을 엮고선 새로운 먹이를 유혹한다 요샛말로 재활용 사냥법인 셈이다 둥근 그물망 속에 비밀의 방을 들이고 그 안에 숨어 삶을 직조하는 처절한 투쟁을 반복한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로 찍어 누르고 자신의 가치를 뽐내고자 온갖 치장을 하고 사는 우리네 삶도 결국 삶을 위한 투쟁 여덟혹먼지거미가 사는 방식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산다는 것은 그렇게 닮은꼴인 것을 *시집, 누군가의 배후, 문학의전당 발베개 ―정충화 종각역 지하도를 지나다가 보았다 잠에서 깨지 않은 어느 노숙자의 한쪽 다리가 천장을 향해 들려 있는 것을 치켜진 무릎 끝이..

한줄 詩 2018.06.12

흙담길을 걷다 - 허림

흙담길을 걷다 - 허림 오래된 바람이 분다 망우 지고 아버지 밭으로 나가시고 들밥 이고 어머니 논으로 나가신다 그림자와 땅뺏기 하다가 은숙이가 소꿉놀이하자고 조른다 흙담장 아래 햇살 받아 살림 차린다 나는 남자라서 아빠가 되고 너는 여자래서 엄마가 된다 무엇이 행복했는지 웃는다 웃다가 어른처럼 싸우고 싸우다가 어머니처럼 울고 흙담장 아래 쪼그리고 앉으면 오래된 바람은 따뜻하다 눈이 자주 내렸다 아침이면 길과 맞닿은 모든 길은 환히 열렸다 흙담장 너머 달 뜨고 백 번이 넘는 계절이 지나갔다 아버지는 취해서도 돌아오지 않고 어머니는 자주 흙담장 아래 다 풀린 실타래마냥 앉아 계신다 오래된 바람이 분다 *시집, 말 주머니, 북인 장칼국시 - 허림 흐린 날은 저녁도 일찍 든다 어머니는 밀가루 반죽에 콩가루 넣고..

한줄 詩 2018.06.12

감자꽃 피는 길 - 김점용

감자꽃 피는 길 - 김점용 내가 아직 너의 문간에 이르지 못했으니 이곳에서 그냥 밤을 세우고 말리라 오늘 하루 얼마나 걸었을까 지는 해의 부르튼 발바닥이 보여 문을 잠근 그대여 너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을 테지 이 길의 두근거림 가도 가도 계속되는 흰 꽃들의 속삭임 가만히 주저앉아 쓰다듬어보면 종일 햇볕이 데우지 않았어도 수많은 발길로 뜨거워진 길 긴 가뭄에도 땅속으로 뻗는 저 알알의 힘 너는 아직 모르고 있을 테지 간간이 한 줌의 굴욕 한 줌의 신산한 기억들도 흰 감자꽃 속에 널브러져 있지만 길을 따라 아름답게 늙어가는 사람들 너는 아직 손잡아보지 못했을 테지 문을 잠근 그대여 나는 아네 언젠가 내가 너의 문간에 이르렀을 때 너무 단단히는 잠그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삐걱거려주리라는 것을 끝끝내 열리지 않..

한줄 詩 2018.06.12

백일홍, 헐벗으며 피는 꽃 - 배정숙

백일홍, 헐벗으며 피는 꽃 - 배정숙 토담 아래로 허물어지는 하루치의 햇살이 쪼아대는 네 목덜미에서 휘청거리는 살냄새가 어지러웠다 빛은 가슴에다 쟁이지만 어스름한 저녁은 수족이 묶여서 시작되는 오뉴월이 을씨년스럽고 추웠으며 마마님이 창궐한 듯 보릿고개는 지푸라기 같은 한숨으로 다스려지지 않았다 누더기처럼 두른 앞치마에 묻어오는 풋보리 냄새 그 얇고 투명한 결을 탐하는 굶주린 헛것들이 이무기처럼 들어앉아 꿈속을 어지럽힐 때마다 꼬질꼬질 접었던 꽃잎을 하나씩 여는 꽃이 있었다 쥐눈이콩 같은 분꽃 씨는 곁에서 물색없이 영글고 헛소문마냥 빈손으로 나서는 등굣길 사친회비 대신 받들고 가던 닭똥 같은 누이의 눈물을 기억하는 것이 힘에 부쳐서 피는 듯 지는 듯 입술 달막거리다가 저무는 꽃이 있었다 실마리가 풀리지 않..

한줄 詩 2018.06.12

못, 두들겨라 연못 - 서규정

못, 두들겨라 연못 - 서규정 후드득후두득 지나가다 괜히 굵어지는 비 경기장에만 가면 먹구름은 왜 몸부림치듯 몰려다니는지 갑자기 생각나요, 시골구석을 온통 미모로 사로잡다 서울로 대학 가, 가짜 고시생과 살림 차렸다 들켜선 아이는 외국으로 입양시키고 첩첩산중에 들어가 한 발짝도 나오지 않는다는, 해인스님 어두컴컴한 토굴 속에서 오늘도 무얼 용맹정진 하시나요 백년이 흘러도 상처 하나 없이 미끈한 것은, 시간과 바람뿐인 것을 환호작약, 여기를 좀 보세요 이 삼만 운집한 관중 앞에서 투수가 백 개 이상 던진 공보다 하나, 이번에 던질 공 하나가 더 중요하다는데 높이 든 관중들 손목마다가 구장에 꽂힌 너덜너덜한 꽃다발이라면 통 목숨, 발끝에서 머리까지가 온통 목 줄기인 해바라기처럼 비는, 이 세상에 처음 박힌 ..

한줄 詩 2018.06.12

탑골공원 - 박승민

탑골공원 - 박승민 아코디언이 낡은 청춘의 시간을 불러낸다 참전용사 김 씨는 한 시간 전부터 돋보기로 한 자 한 자 짚어가면서 신문의 사설을 따라 읽는다 슬쩍 연정을 품었던 전쟁미망인은 중절모에 꿩털을 꽂은 퇴직 교장을 따라 오늘도 그린필드 모텔로 가는가 보다 내가 장기에 진 유가 놈은 연신 담뱃값 우그러진 상을 하며 담배연기만 배롱나무 쪽으로 풀풀 날린다 오늘은 무료봉사 배식차도 쉬는 날 아침에 눈살 찌푸리던 며느리를 생각하면 김정일이보다 아들놈이 더 밉다 북한에 퍼줄 돈이 있으면 노령연금이나 올려주지! 고생이 뭔지도 모르는 젊은 것들이 턱, 턱 야당에 몰표나 주고 아, 이놈의 벚꽃은 왜 자꾸 눈앞에 얼쩡거리는 거야 오늘은 목구멍에 낀 가래도 딱 누워 종일 왼새끼를 꼰다 3,000원짜리 백반을 먹을까 ..

한줄 詩 2018.06.12

늙은 호박의 학명을 묻는다면 - 심은섭

늙은 호박의 학명을 묻는다면 - 심은섭 최초의 학명은 왕족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회색 담장 밖 세상을 동경하는 에서 감형된 장기모범수였을까 열매는 꽃의 유언이므로, 그는 날마다 부활하는 수만 개의 태양이 쏟아낸 압정에 스스로 화상을 입어야 했겠다 그는 신목(神木) 잡고 카인의 원죄를 비는 무녀의 푸른 눈빛이어야 했겠다 18번, '시월의 마지막 밤'을 부르던 늦은 오후 교전수칙을 지키며 성지 순례를 끝내고 걸어온 길을 말아 피운다 그의 온 몸은 길이다 둥근 영토, 빈 내장 그렇게 비워지고 둥글어지던 날 탐정이 찾아와 행방불명 사내의 신발문수를 기록했다 국적이 허기져도 위조지폐는 찍어내지는 않았다 호각소리에 실어증 걸린 새장 속 새벽은 매일 죽었다 머리 쪽으로 날아든 총탄을 향해 늘 웃고 있었다 식물도감..

한줄 詩 2018.06.12

내가 아버지의 첫사랑이었을 때 - 천수호

내가 아버지의 첫사랑이었을 때 - 천수호 아버지는 다섯 딸 중 나를 먼저 지우셨다 아버지께 나는 이름도 못 익힌 산열매 대충 보고 지나칠 때도 있었고 아주 유심히 들여다 볼 때도 있었다 지나칠 때보다 유심히 눌러볼 때 더 붉은 피가 났다 씨가 굵은 열매처럼 허연 고름을 불룩 터뜨리며 아버지보다 내가 곱절 아팠다 아버지의 실실한 미소는 행복해 보였지만 아버지의 파란 동공 속에서 나는 파르르 떠는 첫 연인 내게 전에 없이 따뜻한 손 내밀며 당신, 이제 당신 집으로 돌아가요, 라고 짧게 결별을 알릴 때 나는 가장 쓸쓸한 애인이 되어 내가 딸이었을 때의 미소를 버리고 아버지 연인이었던 눈길로 아버지 마지막 손을 놓는다 *시집, 우울은 허밍, 문학동네 벌침 - 천수호 머리와 가슴 위로 파도가 지나간다 벌린 아가리..

한줄 詩 2018.0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