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장이 서다 - 최정아

마루안 2018. 6. 11. 21:06

 

 

장이 서다 - 최정아


움직이는 자만이 살아 있다

땅속 어둠을 먹고
먼 모래밭 걸어와 난전을 여는 개미들

질끈 동인 허리에 삶이 있다고
풀밭은 물 좋은 바다일 뿐이라고
때론 날카로운 풀잎에 몸을 베어도
모래톱 펼쳐놓은 좌판에는
꽉 움켜쥔 먹이가 놓여 있다

통째로 끌고 가는 기나긴 행렬
도무지 틈이 없는 곳으로 길을 내는
개미들의 본능이
짓물렀다 나은 팔뚝의 흉터 같다

서로의 어깨 부딪치며 존재를 확인하는 개미들
대장간 망치소리도,
떨이를 외치는
어물전 할멈의 쉰 목소리에도
더워지는 장터
모래바람이 뜨겁다


*시집, 봄날의 한 호흡, 문학의전당


 




탐색하다 - 최정아


꼬마전구가 한 사람의 생애를 읽는다
입에서부터 항문까지
누구에게도 보인 적 없는 긴 통로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엄마의 떡을 뺏던 호랑이가
굽이굽이 넘을 적마다 위협이다
떡 하나씩 던져주며 넘어온 오십 고개
내시경의 불빛이 오십 쪽의 내 이면을 뒤적인다
육십 쪽으로의 선회는 디귿자 길이었다
나는 살 한 점을 뚝 떼어준다
주르르 피가 흘러도
구불구불 가야만 하는 길
한 모롱이 돌아서 또 살 한 점을 떼어준다
살아 있어 피가 붉다
아이들 생각에 아픈 줄도 모르고
다시 한 모롱이,
이번에도 살 한 점 떼어 호랑이를 달랜다
한 사람의 생애를 모두 읽은 꼬마전구
가만가만 잠든 내 몸을 빠져나온다




# 최정아 시인은 전북 남원 출생으로 2002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과 2004년 <시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밤에도 강물은 흐른다>, <봄날의 한 호흡>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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