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탱자나무 여인숙 - 서규정

마루안 2018. 8. 7. 13:19

 

 

탱자나무 여인숙 - 서규정


가시가 가시를 알아보듯
상처는 상처를 먼저 알아보지
맨살을 처음 감싸던 붕대가 기저귀이듯
쓰러져 누운 폐선 한 척의 기저귀를 마저 갈아주겠다고
파도가 하얀 포말로 부서지는 그 바닷가엔
탱자나무로 둘러쳐진 여인숙이 있지
들고, 나는 손님을 요와 이불로 털어 말리던 빨랫줄보다
안주인이 더 외로워 보이기를
바다보다 더 넓게 널린 상처가 따로 있다는 듯이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손에 들고

탱자나무에 내려앉는 흰 눈
모래 위엔 발자국

손님도 사랑도 거짓말처럼 왔다, 정말로 가버린다


*시집, 참 잘 익은 무릎, 신생

 

 

 

 

 

 

내 오랜 구기자나무 - 서규정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자, 꽃은 피고 새는 지저귀고
하늘처럼 청명한 마음의 나날을 만들자

책상머리에 붙여놓고 반대로만 살았다
더럽고 치사하다 느낄 무렵 이미 서른을 지났고
삶이 참 아름답다 안절부절 할 땐
육십을 바쁘게 넘고 있었다

아하! 이 거침없는 쾌속
기억은 덕지덕지 누더기만 남겼어도
새는 창공보다 새장 쪽으로 울며 날았다

얼마나 감사한가, 눈 깜박할 사이라는 이토록 고귀한, 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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