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우리의 단련 - 백상웅

마루안 2018. 8. 7. 13:27

 

 

우리의 단련 - 백상웅


온다. 월세 내는 날처럼 온다. 날은.

벽에 박힌 눈알을, 벽에 기댄 등짝을, 우리가 소유하지 못하는 방을 가질 날.
온다. 좀비처럼 온다.

그날이 되면 곰팡이처럼 벽을 타고 울리는 감정들을 우리는 감사히 소유한다.
섹스와 키스를 포기한다.
소유보다는 공중화장실과 공동주방을 선택한다.
따지자면 오늘날의 고시원 같은 그날이 오고 있다.

백수, 택시기사, 용접공, 폐지 줍는 노인,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등의 형식을 가진 감정들이 컴컴하고 눅눅한 복도를 지나 방으로 들어간다.
다 함께, 폭발적으로 문을 연다.
우리가 벽과 벽 사이에 잠들고 깰 때, 날은 주인을 피해 걸어온다.

이 방에서 송장 치는 날이 반드시 온다.
아니라면 싸늘한 시체가 이미 실려나간 방이다.

오고 있다. 건물은 녹슨다. 벽은 얼고 녹기를 반복하다가 쩍 금이 간다.
우리가 걸어둔 눈동자와 등짝도 갈라진다.
모든 게 풍화되고 남은 정적과 노여움을 우리가 소유하는 날이 온다.

옆방에서도 그 옆방에서도 또 앞방과 뒷방에서도.....
한명씩 한명씩 죽어나가 마침내 세상 모든 방이 관이 되는.... 감동적으로 온다.


*시집, 거인을 보았다, 창비

 

 

 



그저 그런 - 백상웅


가방이 뜯어졌다.
속에 든 모든 게 쏱아졌다.

언제 집어넣었는지도 잊은 영수증, 책, 동전, 너무나도 익숙한 흔들림이나 덜컹거림까지도 쏱아졌다.

게을러서 여태 내가 기대고 살았다.

장대비에 젖고 눈발에 얼고 한 날은 햇볕도 쬐고 하면서, 가방은 울상이었다가 펴지기도 하면서.

연애도 하고 이별도 했다.
이력서를 쓰고 면접에서 떨어져도 봤다.

인조가죽이라 망조가 오래전부터 보였다.

집승이 되려다가 만 가방, 짖다가 그만둔 가방, 소처럼 여우처럼 악어처럼 고래처럼
착하지도 나쁘지도 못하는 가방,

가방이 제 밑바닥으로 입을 벌렸다.
찢어지면서 이빨의 형상까지 만들었다.
이제 이 가방의 시대는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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