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바람이 분다 - 주병율

마루안 2018. 8. 7. 13:41



바람이 분다 - 주병율



바람이 분다.

여자들은 화장을 고치고 어디론가 사라져 갔다.

달포를 넘도록 비는 내리지 않아

검은 먼지만 휩쓸려 다니고

사람들은 큰 눈망울만 번득이며

까닭도 없이 말라갔다.

가벼운 말로도

두들겨 맞고 찔리며

발자국들만 어지러이 포개진 더러운 땅에서

아이들은 구겨지거나 부러졌다.

누구도 대낮의 길에서 웃지 않았다.

사내들은 컴컴한 방구석에서

패를 뜨거나 잠을 자고

여자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간간이 창문들이 태양을 향해 열려 있지만

정녕 내일은 믿을 수 없었다.

무너지는 햇볕과

컴컴한 방구석에서의 잠과

기침과

때때로 의심하며

한숨 사이에서 떨어지는 모든 순수한 기억들이

칼 혹은 핏자국이 되는 한낮

낮은 지붕 아래서 새들이 날아가고

바람이 분다.



*시집, 빙어, 천년의시작








칠 일 - 주병율



칠 일 중 육 일을 탕진하고

남은 하루 동안 내내 잠만 잡니다.

이 잠 속에는 돌아갈 칠 일의 마지막 남은 시간도 있겠지만

지난 육 일의 고통도 함께 있습니다.

내가 아직 철이 들기도 전에

아버지는 내게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애야, 세상은 잃는 것도 많지만

배울 것도 많단다"라고

그래서 바람 부는 언덕도 힘겹게 올랐습니다.

기침을 하며 거리에서 밤도 세웠습니다.

술도 마셨고 연애도 했습니다.

이별도 했습니다.

낯선 사람도 만나고

먼 곳을 여행도 했습니다.

각박하게도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끝도 없이 나는 나를 잃어버리고

아무것도 건진 것이 없습니다.

남는 게 없습니다.

칠 일 중 육 일을 탕진하고

남은 하루가 다시 내 안에 드는 저녁

바람만 성성하게 불고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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