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불완전한 선희 - 이진희

마루안 2018. 8. 7. 15:15



불완전한 선희 - 이진희



아버지는
그저 늙기만 한 나의 아버지는
슬픔의 축축한 뒤뜰에 무엇이 자라는지 아직도
관심없다, 분노에 골몰하느라
응달의 꽃들이 언제 피고 지는지
배추흰나비가 갑작스러운 폭우를 어떻게 피하는지
아니? 하고
봄이나 가을의 어느 날 어린 나를 무릎에 앉히고
한 번쯤 다정하게 물어봐 주었다면


증오가 아니라 친구를 원했으면서
여전히 간절히 원하면서
선물보다는 선의를
그리고 내 이름을 어쩌다가 선희라고 지었다면
혹은 아버지의 어느 생의 아름다운 이름이 반드시 선희라면
슬픔의 다정한 목소리가 뜻밖에 선희라면
선희야 놀자, 라는 대문 밖 호명처럼
같이 슬퍼해주기를 원하면서
원했으면서


그래서 나는 태어났을 것이다
슬픔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법을 습득하지 못한 아버지를 위해
다시 태어나지 않으려고
윤회도 구원도 사양한 죽음이거나 삶
은하를 떠도는 고장 난 우주선처럼 쓸쓸하기 짝이 없겠지만


슬픔을 모르는 아버지가 더는 태어나지 않았으면
증오로 가득한 아버지의 머나먼 옆모습부터 사랑해보려고


그의 분노를
막 낳은 핏덩이처럼 뜨겁게 끌어안은 채


십자가에 제 아들을 매단 신에게 밤낮으로 간구하던
나의 할머니
그러나 그녀와는 다르게
회개도 기도도 없이 부끄럽게



*시집, 실비아 수수께끼, 삶창








적과 친구 - 이진희



마법의 두꺼비가 피 묻은 단도를 물고는
펑, 하고 사라져버리길


저의 죽음이 예고된 봉인 편지를
제 발로 신속하게 전달하게 하는 일


증오에서 뽑아낸 피의 잔을
스스로 어처구니없이 엎질렀음에도
훔친 보석을 선물하곤 진심 어린 답례를 기다리는 일


한 손으로는 유리공처럼 아슬아슬한 구원을
남은 손으론 돌멩이 같은 단단한 파멸을 바라면서도
기도의 내용을 감추는 일


그를 위해
오래 기도했다고만 알리는 일


서리 낀 창가에 서서
봄이 막 도착한 정원을 파헤치라고 명령하는 일


스스로 고통스러워하는 당신을 끝없이 모욕하고는
그걸 견디는 당신이라야만 사랑하겠다고
맹세하는 일






# 이진희 시인은 1972년 제주 중문 출생으로 한신대 문예창작과 및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6년 계간 <문학수첩>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실비아 수수께끼>가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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