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발효된 산 - 강영환

마루안 2018. 8. 7. 15:17

 

 

발효된 산 - 강영환

 

 

지리산을 가슴에 오래 담아 두었더니

잊어먹고 있어도 스스로 발효되어

갈수록 깊은 맛이 우러난다

남부능 폭우 속을 젖은 발로 가거나

눈발 속을 얼어붙은 발가락 꼼지락거리며

두류능선을 갈 때 땀내 속에 절여 두었던 산이

파도 몰려오는 한라산 어리목에서 불쑥

가슴을 뛰쳐나와 하늘로 솟구쳤다

새가 되어 바람을 타는 날개 맛

언제나 강물 속으로 뛰어 드는 폐곡선을 따라

길마디 찍어 두었던 발자국이 떠오르고

야생화 한 떨기에도 쓰라렸던 관절

한데 섞여 발효가 된다

씹을수록 단맛이 우러나는 지리산은

더 깊어지고 높아지고 풍만해져서

사시사철 내가 모시고 살아도

땀내 전 발바닥에도 가 닿지 못한다

 

 

*시집, 다시 지리산을 간다. 책펴냄열린시

 

 

 

 

 

 

지리산 땀 냄새 - 강영환

 

 

스쳐가는 산꾼에게서 땀 냄새가 난다

풀냄새도 섞여 있고

바람 냄새도 숨어 있고

물소리도 약간은 섞여 출렁이는 냄새

내게서도 그러하리라

땀 냄새에 숨어있는 지리산 종주길이

얼마 남았느냐는 물음에도

쪼매만 가면 된다는 미소 섞인 답이

믿기지 않지만 반가운 것은

내게 물어도 같은 답을 해주는 이유에서다

진한 땀을 함께 흘리는 주능길에서

땀내 나누고 옷깃 스치며

남은 길을 물어본 뒤 멀어져 갈 때

그가 흘린 땀내를 따라가다보면

더 높은 곳 정상은 가깝기만 하다

 

 

 

 

 

*자서

 

길을 따라 걸어 갔더니

산에 들었다

산을 읽는 건 몸일 뿐

마음이 아니다

작은 물소리에도 눈을 뜨고

한 사십 년쯤 가다보면

길이 없어도 길을 알게 된다

한 그루 노각나무로

어느 골짜기에 우두커니 서 있기 위하여

다시 지리산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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