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유월 바람 - 한명희

유월 바람 - 한명희 잎에 가려 꽃 같지도 않게 피어 있던 감꽃 내린 비에 떨어져 떠날 것은 떠나고 남을 것만 남았다 처마 끝에 달린 달과 어둔 밤을 함께한 별들도 떠날 것은 떠나고 남을 것만 남아서 현충일도 지난 새벽까지 남아서 이렇게 반짝이고 있듯이 별을 닮은 감꽃도 견뎌서 살아남은 힘으로 이 해가 가기 전에 저만의 별을 키워 달콤하고 투명하게 모나지 않게 단단하게 세상에 내놓을 것이니 내가 너를 너라고 부를 수 없는 곳에서 인파에 가려 채 피다 말다 시든 나는 어느 별을 보고 어떤 감꽃에 매달려 천둥 치는 비바람과 서슬 푸른 밤을 새야 땡감 같은 자식들 단단하되 떫지 않은 단감 되어 울 밖에 내놓을 수 있을까 밤비 물러가듯 떠날 때 떠나서 맑고 투명하게 잊을 때 잊혀서 저 별들처럼 하늘에서 빛날 수..

한줄 詩 2022.06.11

두어 닢 그늘을 깔기까지는 - 홍신선

두어 닢 그늘을 깔기까지는 - 홍신선 마을 길섶 느티나무 밑동에 너덜대는 껍질들 길고양이가 발톱이라도 갈았는가 앞발 들어 할퀴었는가 지나는 어느 태풍에 생살 찢기거나 누군가의 가지치기하는 낫날에라도 찍혔는가 그렇게 더께 진 흉터를 숱하게 제 안에 숨기고 보듬어서야 나무는 암암리에 터득했는지 우람한 한 그루 고목으로 때때로 그늘 두어 닢씩 꺼내 펴 주곤 했다. 이제는 하릴없이 늙어 노골로 선 그 등줄기엔 반들반들 줄곧 세월이 오르내린 길도 나 있다. 사람도 뭇 것들에 두어 닢 그늘이라도 깔아 주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깊게 패인 상처들을 쟁여 안아야 하는가. *시집/ 가을 근방 가재골/ 파란출판 손에 관한 명상 - 홍신선 왠지 이즘 내 손은 움켜쥐거나 붙잡질 못한다. 찻숟가락을 집었는데 그놈은 제멋대로 탁자에..

한줄 詩 2022.06.11

빈혈 또는 슬픔증후군 - 김태완

빈혈 또는 슬픔증후군 - 김태완 원인을 찾기 가장 어렵다는 현상 못이 박히는 벽이 되어 보기도 한다 못질에 파이는 상처 하나쯤은 견딜 수 있다 너를 온전히 일으키기 위하여 더러 날카로운 문장을 쏟아내기도 하고 무성한 가시밭을 걸어보기도 했다 애증의 눈물이 가슴까지 젖어가는 순간에도 중심을 잡으려 질끈 눈을 감고 더 크게 눈을 뜨고 사랑한다 사랑한다 보듬어 가며 장성할 그날을 위해 무거운 아침을 들어올렸다 빛나는 나날들이 꿈결같이 지나가고 온전하면 그것으로 됐다고 다짐하면서 잡초를 뽑아내는 농부가 되어 물이 되고 햇살이 되고 때로는 폭풍우가 되어 흔들어 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린 줄 알았잖아 안과 밖이 부둥켜안고 울어버렸다 그런 말이 어디 있을까 했는데 그런 말이 있었다 *시집/ 다음이 ..

한줄 詩 2022.06.10

살아간다 - 정덕재

살아간다 - 정덕재 -또 201호 남자는 닷새 뒤에 이런 날은 족발이 어울린다며 프랜차이즈 족발집 상표가 또렷한 하얀 비닐봉지를 들어 보였다 1층에서 2층까지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201호는 족발 예찬론자이다 땡볕에도 소나무는 푸르렀고 한 달 넘게 비 구경을 하지 못했다 늦은 밤까지 30도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온도는 족발을 푹 익히는 날이었다 정육점에서 나오는 부인을 보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밝은 표정으로 나온 부인은 초혼이고 즐거운 얼굴로 올라가는 남편은 재혼이다 다음 날 가족 한 명은 곱창이 들어 있는 검정 봉지를 높이 들어 이런 날의 아름다움을 칭송할 것이다 201호의 돼지고기는 하루는 족발이고 하루는 곱창으로 살아간다 *시집/ 치약을 마중 나온 칫솔/ 걷는사람 뜀박질 - 정덕재 -601호 다섯..

한줄 詩 2022.06.10

당신이 양심수 - 송경동

당신이 양심수 - 송경동 감옥이 따로 없어 법정최저임금 정도나 받는 강제 노역에 시달린 후 저물 무렵 반지하나 옥탑방으로 자진해 입방하는 당신이 양심수 학자금 대출은 언제 갚나 실업의 번호표 달고 차디찬 면접장 찾아가 또 물먹고 좁은 고시촌 계단을 터벅터벅 올라가 스스로 입감되는 당신이 양심수 평생을 일해도 가질 수 없는 집 한칸 묵은 세간 꾸려 다시 낯선 주소지로 이감 가는 당신이 양심수 요양병원에라도 보내지면 다행 보호관찰도 없는 단칸방에서 누렇게 뜬 채 고독사하는 당신이 양심수 그래서 더 위험한 회유의 대상이어서 가끔은 기초수급자니 최임노동자니 청년수당이니 기본소득이니 알량한 당근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당신이 진짜 양심수 *시집/ 꿈꾸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창비 청소용역노동자들의 선언 - 송경동 ..

한줄 詩 2022.06.08

삶이 순하고 착해서 - 정채경

삶이 순하고 착해서 - 정채경 이모는 아기처럼 쌔근쌔근 잠을 잘 잔다 남편의 강짜에 눈 밑에 퍼렇게 그늘이 내려앉아도 사고로 남편을 보내고 주위에 떠밀려 소송을 준비하던 때도 절대 자신의 고통을 남에게 내비치지 않았다 남편을 땅에 묻고도 끄덕끄덕 잠은 오고 꼬르륵 주린 배는 밥을 달라 아우성이더라 때맞춰 밥 먹고 잠 한숨 자고 나면 다 살아지더라고 나이 서른다섯에 혼자되어 자식 셋을 키울 때 팔자 고칠 뻔한 남자가 있었다 끼니를 거르고 남자를 경계하는 자식들의 불안한 눈빛 때문에 돌부리 자갈길을 몇 날 며칠 터벅터벅 혼자 걸었다고 이제 편히 모신다며 요양원을 알아보느라 분주한 아들 자식의 마음을 읽을 수 없는 이모는 더없이 행복하다 결혼하는 손자에게 자신의 집까지 내어 주고 그저 잘 먹고 한잠 자고 나면..

한줄 詩 2022.06.08

망막하다 - 박수서

망막하다 - 박수서 창문을 닫다 창밖을 보니 달이 무당벌레처럼 동그랗고 예뻐 한참을 바라보다 심야영화관 영사기처럼 잘 때를 놓쳤어 구슬치기 구슬 알처럼 사방팔방 방안을 굴러다니다 한쪽 구석에 겨우 박혀 소등했겠지 피곤한 아침 세수하러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을 보는데 왼쪽 눈이 토끼 눈이네 실핏줄 터진 눈이 아무래도 신경 쓰여 읍내 안과에 갔어 의사는 혈관을 살펴보자 안구 엑스레이를 찍고 둘이 모니터를 보는데, 망막하데 망막 원둘레에 간신히 닿지 않은 검은 점 하나 혈관 끝에 박혀 있는 거야 강아지나 고양이 기생충이 눈에 들어가 되어버린 상처일 수 있고 만약 상처가 커진다면 망막을 덮어 앞을 못 볼 수 있다는 거야 아, 살며 나도 모르게 만들어진 상처의 성장을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어 그것이 자랄지, 즐겁게..

한줄 詩 2022.06.06

학생부군신위 - 이우근

학생부군신위 - 이우근 제사 때, 아들이 물었다 할아버지는 무슨 학생이셨고 어떤 공부를 하셨나요? 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다만, 니 애비 먹이고 가르치려 삶을 실천했다고, 그만한 공부가 또 어디 있겠는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버지, 이미 신(神)의 위치에서 책임 없는 하늘에서 떵떵거리며 사실 것이다 지상에서 못한 거 화풀이로 횡포를 부리면서 창밖을 봤다 그 쓸쓸함의 생애가 사무친다. *시집/ 빛 바른 외곽/ 도서출판 선 경강선 - 이우근 곤지암에서 경강선 전철을 탔다 세종대왕릉 역에서 내려 버스를 기다리지 못해 대왕(大王)에게로 걸어서 갔다 삶의 속도에 대해 생각했다 왕릉에서 가만히 종일 잘 놀았다 김밥의 단무지와 홍당무와 시금치의 색깔이 그리 고운 줄 몰랐다 단촐한 소풍이었다 과정과 결과가 다 아쉬웠지만..

한줄 詩 2022.06.05

저녁 공부 - 문신

저녁 공부 - 문신 감나무 잎에 빗줄기 들이치는 것 지켜보다가 낡은 서가에서 책 꺼내 오는 일을 잊었다 빗소리 차근차근한 저녁에 공부하는 일은 애당초 틀려먹은 일 차라리 행인처럼 낯설게 두리번거리는 저녁을 공부하기로 한다 저녁은 본문 사이에 낀 인용문처럼 다소는 어색하게 굴기로 작정한 모양으로 스멀거리고 이마를 들면 꼭 누군가를 만나지 않고는 지나칠 수 없는 길목에 저녁이 걸려 있다 이런 저녁이면 어른들은 술동무를 찾아 끄덕끄덕 빗줄기를 헤집어대었다고 들었다 그러나 발목까지 젖어드는 저녁에 저녁을 공부하는 일은 저 감나무 앞에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문장을 캄캄하게 옮겨 적는 일 그런 뒤 비 그친 감나무 잎 그늘에 낡은 의자를 내다 놓고 또 나는 누구인가, 라는 캄캄한 문장을 팔팔 끓는 목청으로 읊어대는 ..

한줄 詩 2022.06.05

막차는 오는데 - 부정일

막차는 오는데 - 부정일 하필 전염병으로 나라 안팎이 어수선할 때 벚꽃 흐드러지게 핀 길 따라 간 요양병원은 잠시 몸 추스를 동안 머물 곳인 줄 알았네 애들 한번 못 보고 요양병원에 누워만 있다가 꿈인 듯 순간에 찾아온 막차에 올라 도착한 곳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가 잠든 가족묘지 한 자리를 택해 누우니 애들이 곡을 하네 손자는 훌쩍이고 아내는 멍하니 보네 어릴 적 병치레로 애먹인 셋째 딸이 슬프게 우네 누구에게나 결국 막차는 오는데 필십 중반 이미 볼 장 다 보았는데 무슨 미련이 남아 더 보려고 하겠는가 아내여 먼저 와 자리 잡고 있으니 조금 있다 오시게 덜컹거리며 장의업체 포클레인이 가네 모두가 모여 차례로 막잔 올리며 절을 하네 봉긋봉긋 봉분들 팔 벌려 나란히 선 가족묘지에 나 홀로 두고 늙..

한줄 詩 2022.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