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거미집 - 한명희

마루안 2022. 5. 12. 21:18

 

 

거미집 - 한명희

 

 

첫째도 성실 둘째도 성실 셋째도 성실

수평으로 걸려 있는

사훈

아래

삐딱하게 서 있는 현황판과

부서진 의자가 거미집을 키우고 있는

가구 공장 사무실

 

지켜보다가 계속

외면하다가

 

맺힌 빗물이 저도 모르게 찔끔 떨어졌는지

공장을 덮고 있던 구름이

뜨는 해를 기다리다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땀만 흘리다 사라졌는지

 

연극과 영화가 눈이 맞아

세상 물정 모르는 스물여덟이었다가

연기도 안 되고

얼굴도 안 돼서

몸이 되는 막노동으로 살다가

만난 여자와 나이 마흔이 넘어서야 찾아온

거미집

 

-이름 모를 곤충들의 날개와 누군가의 목숨과도 같이

흔들리는 줄에 이슬방울만 방울방울 달고 있는

 

창가엔 먼지를 뒤집어쓴 탁자와

뚜껑 열린 주전자가 주둥이를 삐죽 내민 채 있고

막걸리 자국 선명한 컵들은 지붕조차 사라진 바닥에 쓰러져 있다

 

부도난 서류철 들고

세상 참 뜬구름 같다던 누구처럼

 

 

*시집/ 아껴 둔 잠 / 천년의시작

 

 

 

 

 

 

불면 4 - 한명희

-낮게 떠서

 

 

신세계인가 백화점과 펜트하우스가 있는

빌딩 속에 끼어 있다 풀려난 하루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낮게 떠서 뜬구름 잡다 추락한 친구들과 어디 먼 데

참치잡이 원양어선이라도 탈까 망설이던 중에 만난 10차선 도로에 줄지어 선 차량과 건물들,

이게 다 원양에서 잡은 대구나 참치였다면 내가 사는 충청도가 먹고도 남아서

 

황해도나 함경도의 백성까지도 배부르게 잠들 수 있겠다 싶은 하루는

최종 면접에서 탈락한 취준생의 밤을 밝히는 태양이거나 택배 10년 만에

정규직이 된 어느 가장의 집에 핀 봄날이 되어도 좋을 하루는

 

더더욱 낮게 떠서 뜬구름 잡다 추락한 친구들과 지하도를 걷는 중에

가출한 사내와 소녀를 만나고 폐지와 빈 병으로 하루를 산다는 리어카를 만나서

 

오르는 계단마다 무너지고 막혀서 벽에 부딪친 듯 온몸이 쑤시고 아파서

슬펐으나 그래도 죽고 싶지는 않은 하루는

자고 나면 또 새로운 하루로 남아서

 

추락할망정 뜬구름이라도 잡아야 할 것 같은 친구들과 밤새 땀방울로 빚은

밀떡을 입에 물고 기도하듯 위하여! 위하여를 외치는

 

 

 

 

# 한명희 시인은 대전 출생으로 2009년 <딩아돌하>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마이너리거>, <마른나무는 저기압에 가깝다>, <아껴 둔 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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