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병원 정문에서 - 신철규

마루안 2022. 5. 9. 21:47

 

 

병원 정문에서 - 신철규

 

 

병원 정문 앞 과일 노점상

붉은 사과가 차곡차곡 쌓여 있다

 

아담과 이브의 타락

치욕의 공동체

누구나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

늙음은 몸이 구부러지고 작아진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병원은 절망의 늪이고 누군가에게는 갱생의 회랑이다

 

겨울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들어간 사람들

자신의 그림자를 보며 걸어나온다

언제부터 절망은 희망보다 더 깊고 짙어졌는가

불안과 원망은 왜 한통속인가

 

입안이 헐었다

음식에 손이 가지 않았다

당신이 그렇게 뜨겁고 쓰렸던 것도 다 내 안이 헐었기 때문이다

하늘이 헐었다

구름이 따갑다

나보다 내 그림자가 먼저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노점상 앞 걸인은 여전히 엎드려 두 손을 모으고 있다

햇살 한 줌이 고여 환하다

 

성자처럼 일어나 내 손을 움켜쥘까봐

저 한 줌의 구원을 내 이마에 들이부을까봐

 

주머니를 뒤져 동전 한 움큼을 그의 손바닥에 쥐여준다

그는 온몸을 부르르, 떤다

 

 

*시집/ 심장보다 높이/ 창비

 

 

 

 

 

 

만종 - 신철규

 

 

외할아버지는 헛간에서 목을 맸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사십 년이 지난 후였다

큰 키 때문에 그는 헛간 시렁에 줄을 매고

앉아서 혁대로 목을 맸다

 

외갓집 마루 벽에 걸려 있던 밀레의 <만종>

멀리서 종소리가 울리면 농기구를 천천히 내려놓고

부부는 무엇을 빌었을까

자신들보다 먼저 땅으로 돌아간 자의 영혼이 평안히 쉬기를?

곁에 있는 사람이 자신보다 먼저 죽지 않기를?

 

화분 속의 물이 줄어들었다

꽃은 다 시들어 물을 빨아들이지 못한다

무언가 희미해지고 있다

희미한 슬픔을 문지르면 하얀 것이 묻어나왔다

 

지상의 불빛들이 구름을 잠 못 들게 한다

공중에 뜬 흰 돌칼,

목에 그으면

새하얀 피가 뿜어져 나올 것 같다

 

 

 

 

# 신철규 시인은 1980년 경남 거창에서 태어나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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