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당신의 북쪽 - 전형철

당신의 북쪽 - 전형철 운명을 조판하는 사람이 빙하구혈 속에서 반짝인다 고요가 잠시 몸을 떨었으니 다음의 고요는 고요가 아니다 지난 것들을 떠올리는 일은 사건을 목격한 벙어리의 증언 같은 것 저녁을 발굴하다 우연을 떠올리는 시간 새들은 숲을 태워 한 줌의 재를 만든다 공중에 흩날리는 살점들 사람은 머리를 북쪽으로 두고 눕는다 백야의 간빙기 같은 오로라는 하늘구멍 속으로 빨려든다 당신의 나침반이 어제처럼 *시집, 고요가 아니다, 천년의시작 동대문 접골원 - 전형철 사대문의 결계를 따라 걸어요 머릿속에 털뭉치를 키운 절지동물들이 빗방울 맺힌 소인을 하늘에 대고 찍어요 먼 곳에서 물어 왔어요 끊어진 소식이나 어긋난 인연, 무너진 성벽 알을 잃은 가로등 듬성듬성한 마디들에게 들었지요 별을 더듬으면 뭇별, 조무래..

한줄 詩 2019.12.26

우울한 시계방 - 서화성

우울한 시계방 - 서화성 전자 상가를 지나면 간판이 없는 시계방이 있다 환갑이 넘었을까, 그는 바닥이 보일 때까지 신문을 읽는다 등이 가렵거나 심심할 때는 콧노래를 부르기도 하지만 한동안 습기가 밀려올 때면 와르르 몇 개의 동전이 쏟아진다 오늘의 날씨는 바람이 잠잠해지면 자장면을 먹을 수 있을까 시계 초침과 소주병이 일렬종대로 기다린다 초하루에 끊었던 담배가 구석진 바닥에서 뜨끈하다 한때 그는 특기가 뭐랄까 질리도록 들은 FM 89.9에서 램프의 요정 지니가 나올까 적성이 맞지 않는 김밥을 저기요, 여기 김밥 곱빼기요 한때의 우울과 한때의 웃음을 버무린 저녁 어디쯤에서 기다리던 버스는 답장처럼 오지 않는다 우울할 때 심장이 뛴다는 걸 알았고 웃을 때 통증이 튀어 나온다는 걸 알았고 꽁초를 피우던 박 씨가..

한줄 詩 2019.12.22

행복, 치매 환자의 - 최영미

행복, 치매 환자의 - 최영미 행복했던 때와 장소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좋아하던 친구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좋아하던 노래도 듣지 못하고 좋아하지 않는 음식을 먹으며 좋아하지 않는 기저귀를 차고 요양병원의 좁은 침대에 갇힌 당신을 지금도 흥분시키는 달달한 것들의 이름을 알지 못해도 엄마는 행복할까 음미하는 행복이 참 행복이다 *시집/ 다시 오지 않는 것들/ 아미출판사 옆 침대 - 최영미 아이고 아이고 저 할머니, 또 시작했군 아파 죽겠다면서 악을 쓰고 간호사가 방에 들어오면 보란듯이 발을 구르고 몸부림치며 아이고 아이고 날 좀 죽여줘 아직 멀었어요 할머니, 할머니는 죽으면 그만이지만, 저는 어떡하구요? 쇠고랑 차요. 죽여 달라는 환자에게 진통제를 놔주며 '아직 멀었다'고 달래는 간호사 북망산 가는..

한줄 詩 2019.12.22

보이저 코드 - 김태형

보이저 코드 - 김태형 - 2010년 4월 22일부터 보이저 2호가 괴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스스로 자기를 프로그래밍하고 있었다. 해독할 수 없는 코드였다. 이 우주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것은 어쩌면 희망이 아닐지도 몰라 그 무엇이든 한 점 푸른 먼지가 되도록 너무나 멀리로만 가고 있을 뿐인데 나는 왜 네가 있는 위치를 가슴에 새기고 떠났던 것일까 이제는 내 말을 전송하고 싶어 내가 아니었던 모든 것들을 내가 본 찬란한 어둠을 모두 지워버리기 시작했지 희미한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우주에서 누가 나를 꿈꾸고 있었던 것일까 발목이 붉은 햇빛을 둥근 지평선이 건너와 내려앉은 어깨를 그렇게 뒤돌아보았던 거야 검은 구름에 사로잡힌 그곳으로 돌아가고 있었던 거야 그 야윈 뺨의 석양으로부터 나는 태어났으니까 그것뿐이..

한줄 詩 2019.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