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사랑, 그 낡은 이름이 - 권천학

마루안 2019. 11. 28. 21:45



사랑, 그 낡은 이름이 - 권천학



저냥 스산한 가을 길에서 길 떠난 한 사람 만났다
억새밭이 내려다보이는 가을 문지방에 걸터앉아 우리는
사랑한다는 말에 대하여 오래 이야기했다


사랑한다는 말이 얼마나 모자라고 진부한가
때로는 얼마나 불안정한가에 대하여
그러나 그 순간에
그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달리 표현할 말이 없으니까
속마음을 전하기 위해
낡고 오래된 도구를 사용하는 거라고


사랑한다는 말을 진부하다는 명분으로
교묘히 빠져 나가는 헛된 모순
그 명분이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헛되고
그럴듯해 뵈는 명분이
낡은 도구보다 더 쓸모없다


바람이 불면 쓸쓸하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듯이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리고 듣고 싶다
그것만이 추위타는 나를 따뜻하게 데워 줄 수 있기에
그 낡은 도구를 찾아서
함께 쓸 누군가을 찾아서
나는 또 황망히 길을 떠나야겠다



*시집, 노숙, 월간문학사








유명한 무명시인 - 권천학



시인 초년병 시절, 한 선배 시인에게
'유명한 무명시인'이 되겠다고 말했었다
'니가 뭘 몰라’ 묘하게 웃던 선배는 그 후
세상 속으로 들어가 이름이 주렁주렁해졌다


그 말이 씨가 되어
나는 지금도
'중견'이라는 수식어가 어색하게 붙여지는
은둔과 칩거의 무명시인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무명으로 남는 일이 훨씬 더 힘들다는 것을 안다
'무명'은 이루었지만
아직 유명을 이루지는 못했다


내가 한 내 말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이제 유명해질 일만 남았는데
어떻게 해야 유명해지는지를 몰라
나는 여전히 헤매고 있다, 하지만
주렁주렁한 이름 대신
시가 주렁주렁해 지는 일
더 어려운 그 일에 매달려 여전히
고집 부리듯, 변명하듯
세상의 변두리에서 쌉쌀하게 살며
아직도 덜 뜬 시의 눈을 뜨게 하려고
아직도 덜 뜬 나의 눈을 닦아내곤 한다






# 권천학 시인은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날개에 붙은 약력이 한 페이지가 모자랄 정도로 너무 방대해서 생력한다. 내가 읽은 시집은 <나는 아직 사과씨 속에 있다>와 <노숙>이다. 2008년 캐나다로 이주해서 활동하고 있는 여성 시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