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바람 부는 날 세상 끝에 와서 - 최성수

마루안 2019. 11. 28. 21:55

 

 

바람 부는 날 세상 끝에 와서 - 최성수


장작을 열 개쯤 아궁이에 넣고
캄캄한 방 안에 눕는다
봉창문 밖으로는 밤새도록 바람이 분다

바람은 때로 호리병 속을 빠져나가며 높은음을 내다가
갑자기 여러 사람이 두런거리는 소리를 내기도 하고
사랑을 잃고 홀로 흐느끼는 여인의 울음이 되기도 하고
더러는 나뭇잎으로 창호지를 후려 패다가
천지 사방 고립무원의 적막한 순간을 보여주려는 듯 딱 멈추기도 하며
산마을의 밤은 점점 깊어간다
절절 끓는 방바닥에 온몸을 지져가며 나는
백석을 생각하다가 유배지 초막에 남은 약전을 떠올린다
설핏 잠들었다가 바람 소리에 다시 깨어나
빈 어둠을 뚫어져라 바라보기도 하며,
꿈도 아니고 꿈같기도 한 시간이 흐른 뒤
세상을 잊어버리려 짐짓 온몸의 맥을 풀어놓고 만다
삶이란 가을 잎, 그 잎을 떨구는 바람 같은 것임을
세상은 허울 좋은 개살구 같은 것임을
저리 번잡스럽지만, 결국 스러져버리는 것임을
군불을 때고 절절 끓는 이승에서 몸 지지며 하룻밤 자고 가는 것임을
깨닫는 이 시간에도

바람이 분다
바람 소리가 운다


*시집, <물골, 그 집>,도서출판 b

 

 

 

 

 

 

낙엽송 - 최성수


나이 든다는 것은
제 빛깔을 하나하나 지워가는 일

비 내리는 가을 숲가에서
겨울 채비로 제 잎을 떨구는 낙엽송을 보면
지나간 시간 모두 아름답다

절정에서 스러지기 위해 낙엽송은
그토록 빛나는 얼굴을 했던 것일까

아랫도리부터 차근차근 지워가는
낙엽송의 노오란 빛

지우고 지워 마침내는
검은 선 하나로 남는

제 빛을 다 지우고서야
비로소 완성되는
낙엽송

생은 저렇게 결국
무채색으로 남은 풍경 같은 것

비는 내리고
나는 겨울 숲처럼 천천히 지워지고 있었다

 

 

 

 

# 최성수 시인은 강원도 횡성 안흥면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때 서울로 전학해 성북동에서 살았다.  약 30여 년 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놀며 배웠다.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을 당했다가 복직했다. 퇴직 후 다시 고향 안흥으로 돌아와 얼치기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1987년 시 무크지 <민중시> 3집을 통해 작품 발표를 시작했다.  시집으로 <장다리꽃 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사랑은>, <천 년 전 같은 하루>, <꽃, 꽃잎>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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