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아름다운 날 - 육근상

마루안 2019. 11. 28. 22:17

 

 

아름다운 날 - 육근상


내가 입고 있는 이 고동색 윗도리는 비정규직 아들이 아끼고 아낀 월급 쪼개 생일 선물로 사준 것이다 내가 이 추운 날 밖으로만 떠돌아도 한 끼 굶지 않는 아름다운 이유다

내가 입고 있는 이 푸른색 바지는 여름휴가 때 각시가 겨울옷은 여름에 사놔야 한다며 중앙시장 누비 집에서 간신히 이천 원 깎아 사준 것이다 내 이 추운 날 밖으로만 떠돌아도 몸 따끈히 데울 수 있는 한 잔 술이 곁에 있는 아름다운 이유다

내가 입고 있는 이 베이지색 도꾸리는 하나 밖에 없는 딸네미가 가으내 백열등 아래 앉아 기러기 울음 한 올 한 올 엮어 선물로 준 것인데 아무리 취해 기역자를 걸어도 다른 곳 가지 않고 집으로 찾아가는 아름다운 이유다

겨우내 들고 다니던 촛불 아직 꺼지지 않고 문간 매달아 놓은 지등(紙燈)처럼 반짝이는 이유는 내가 짋어진 아름다운 날들 다 갚아야하기 때문인 것인데 늦봄 넘어온 진달래꽃은 절경 이루며 비탈길 걷고 있구나 식은 아궁이 노을도 붉게 타고 있구나


*시집, 우술 필담, 솔출판사


 

 



바람벽 독서 - 육근상


병아리들도 정짓문 앞에
공부하느라 삐약 거리고 있었네
염소는 저 넓은 들판 다 읽고
제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네
강아지는 숙제 다 했는지 어슬렁거리며
낯선 사람이 와도 짖지 않았네
책 한 권 없이 절구통만 덩그러니 놓인
빈집 지키던 나는
이제 막 한글 떼고 글자라고 생긴 것은
무엇이고 읽고 싶었네
마루에 앉아 딸기밭 가신 엄니 기다리며 다리나 까불다
마루 기둥 잡고 덮걸이* 안디리질*이었던 것인데
엊그제 바른 안방 도배 벽지 삐져나온 글자들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네
나는 바람벽 바짝 붙어 앉아
한 글자 한 글자 떼어먹기 시작하였네
손가락 침 묻혀가며 떼어먹는 재미는
읽은 책 또 읽으며 되새김질인 염소 비할 바 아니었네
바람벽에는 아톰 있었고 새농민 있었고
어깨동무 있었고 섬마을 선생 있었네
나는 하루 종일 키 닿지 않는 곳만큼
바람벽 독서 열중이었는데
방바닥에는 먹다 흘린 글자들이
병아리가 쪼던 쌀눈처럼 하얗게 쌓였네
밭에서 돌아오신 엄니 깜짝 놀라 종아리 치셨네
내 독서는 침 묻혀가며 떼어낸
바람벽 도배 벽지에서 시작되었네


*덮걸이: 오른다리를 상대의 왼다리 바깥쪽으로 걸어 넘어뜨리는 씨름 기술.
*안다리걸기: 오른쪽다리를 상대의 왼다리에 걸고 넘어뜨리는 씨름 기술.





# 육근상 시인은 1960년 대전 출생으로 1991년 <삶의 문학>에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절창>, <만개>, <우술 필담>이 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소를 생각함 - 김창균  (0) 2019.11.30
그들의 계획 - 안시아  (0) 2019.11.29
바람 부는 날 세상 끝에 와서 - 최성수  (0) 2019.11.28
사랑, 그 낡은 이름이 - 권천학  (0) 2019.11.28
이승의 일 - 박지웅  (0) 2019.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