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저항의 방식 - 김사이

마루안 2019. 12. 2. 21:32



저항의 방식 - 김사이



가난한 목숨들은 불행의 지분이 많다

불행은 구경꾼들처럼 떼로 덤비기도 하지만

옆구리를 찔러 자빠뜨리기도 한다

슬픔 한방울까지 쪽쪽 빨아 배를 불린다

나는 녹이 슬어 삐걱거린다


재계약 즈음 수직으로 서 있는 사다리는

구멍 난 욕망이었다

피가 바짝바짝 타들어가도

답은 정해져 있고

세계가 폭주할수록 정의는 더 멀어져갔다

내 심장은 힘차게 뛰고 있으나 나는 쓸모없고

살아야 해서 바람의 지분들을 그러모아 대기 중인 나는

살아서 무참히 시들어갔다


밥벌이는 고단해도 소박한 밥상과 일상이면 되었다

알맞은 체온으로 알맞은 꿈을 꾸며 알맞게 살고 싶었다

나는 누구의 무엇의 부제가 아니라 나였어야 했다

머뭇거림과 두려움 사이에 망각의 강이 흘러

오랜 세월을 외면한 나는 뿌리 없는 씨로 떠돌았다

불행의 눈동자에 갇히니 삶이 쭉 대기발령이다


그늘의 딸로 태어나 그늘진 몸에 알록달록한 무늬들

나를 걸어 잠근 이번 생은 글러먹었다

오롯하게 내 죽음을 누리는 것

스스로 죽어가는 시간에 내가 마침표를 찍는 것

글러 먹은 생에 대한 저항으로



*시집,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고 한다, 창비








다시 반성을 하며 - 김사이



며칠째 폭설이 멈추지 않는 날

얼어붙은 옥탑방에서 내려와

오랜만에 몸을 담그자 후끈해지며 땀이 난다

찰랑거리는 물속으로 묵은 때가 층층이 쌓이는데

수북한 지우개똥

늙어가는 여자의 몸은 생각만큼 아름답지 않지만

온몸이 얼룩덜룩해도 향기 있게 늙어갈 수는 없을까

푸석거리고 늘어진 몸

지나간 그리움도 불안한 내일도 버텨야 할 몸

키득거리다가 쓰윽 훑어보다가

문득 언제든 죽겠으나

멧돼지가 먹을 것을 찾아 자꾸 농작물을 덮치는데

가축들이 병 걸렸다고 산 채로 매장당하는데

더불어 살자는 말이 세치 혀에서 놀아나

너에게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한다

자연에 이르는 자연스러운 죽음이 있을까

한밤중에 나는 살고 싶어 회개하듯 몸을 빡빡 씻는다

더불어 살자를 죽이면서 너도 죽이면서 숨을 쉰다

차갑게 식어가는 물이 붉게 물든다

온몸 벌게지도록 치열함은 없고 신파만 밀려나와

늙어가는 감각과 낡아가는 몸뚱이를 끌고

살아야 하는 시간이

무구한 원혼들 위에 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나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이 비극일 줄은

그래서 더 사람으로 죽어야겠는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저녁 자작나무 숲 - 김창균  (0) 2019.12.02
숭고한 밥 - 김장호  (0) 2019.12.02
그대 어느 계단쯤에서 - 부정일  (0) 2019.12.01
흰 나비 도로를 가로지르고 - 노태맹  (0) 2019.12.01
칼새의 행로 - 천융희  (0) 2019.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