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첫, - 서화성

마루안 2020. 1. 1. 19:05

 

 

첫, - 서화성

 

 

기차가 떠나고 보고 싶은 단어를 쓸 수 있을까

슬픔역을 지나 고독역을 지나 다음 역에서 찾을 수 있을까. 이 밤이 가기 전에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당신과 유일하게 했던 대화와 스물아홉 눈물에서 

 

빼곡히 적힌 달력을 지나 한동안 아팠던 골목길을 지나 천천히 걸어오고 있을까. 언제나 그랬듯 그 자리에 있을까

사랑은 언제쯤 오고 있을까

숨바꼭질하듯 왼쪽에 숨어 있을까

 

언젠가 밤새 앓았던 열병처럼

언젠가 날씨와 웃음이 궁금해지면

마지막 보았던 연극에서 아니면 우체통에 남겨진 먼지에서

그렇게 달빛과 걸었던 갈대밭에서 등 돌린 당신의 얼굴을 그릴 수 있을까

 

천둥과 봄이 온다며

비온 뒤 떨어지는 꽃잎이 궁금해진 날,

 

어깨를 나란히 했던 어느 빛바랜 사진에서

노을빛 얼굴이 붉어질 때까지 강둑에서 기다리리라

고백역을 지나 소망역을 지나 지도에 없는 첫사랑이 되어 오고 있을까

 

 

*시집/ 당신은 지니라고 부른다/ 산지니

 

 

 

 

 

 

소멸의 증거 - 서화성

 

 

몸에서 쓰다 남은 기억을 끄집어낸다

 

걸으면서 할 일은 소멸의 증거라고

말을 기억하는 것은 생각이 아니고 단어에서 찾았다

그때는 무슨 말이었고

이기지 못하는 것이 눈꺼풀이라고 기억에서 들었다

 

불이 났던 집을 지나간 적이 있었다

내복 속으로 숭숭 바람이 들어오는 날이면

흙먼지와 목소리를 듣거나 들은 적이 있었다

그것이 보름달인 줄 알았다

 

고봉밥을 게 눈 감추듯 먹은 적이 있었다

한오백년을 부르다 아궁이 옆에 잔 적이 있었다

그런 당신을 기다린 적이 있었다

 

역전 휴게실 구석에서 후후 불어가며 먹던

마흔아홉의 가장처럼

말 못할 고백은 아련한 기적소리처럼

몸에서 흐르는 동맥과 당신의 기억에서 숨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