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회전목마, 겨울 - 조항록

마루안 2020. 1. 2. 21:53

 


회전목마, 겨울 - 조항록

 

 

아무도 타지 않은 회전목마가 서 있다


햐얀 콧김 뿜으며 달리고 싶은데
두근거리며 담담해지며
돌고 돌아 제자리이고 싶은데


좋은 날은 갔나 봐


어쩌면 영영


쇠처럼 굳고 단단할수록
뼛속 깊이 출렁거리는 것이 있다
적멸의 시간
그게 다 얼어 이렇게 차가운데
누가 손을 내밀면 앙상해진 갈기가 움츠려드는데


내달리지 못하는 다리는 말뚝인가 봐


어디로 달아나지도 못하게 하는 저물녘


빈 둥지가 된 안장에 석양이 결가부좌를 튼다
형체는 없으되 무거운 것이 올올하다
그럴 수 있다면
옛날을 버려 돌아눕고 싶은가 봐


슬쩍 혀를 깨문다

 

 

*시집, 눈 한번 감았다 뜰까, 문학수첩

 

 

 

 

 

 

새해맞이 - 조항록

 

 

먼지를 털어내고 유성기판을 한번 돌려보자는 것이다 만날 분명한 것이 지겨워 뽕짝 한번 구슬피 뽑아보자는 것이다 그래,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면 물망초다방이 있어 설탕 두 스푼에 프림 세 스푼으로 시간을 마셨지, 심약한 권태는 중랑교 동시상영관에 몸을 묻고 주룩주룩 내리는 비에 오후를 내내 적셨지, 비좁은 종로서적 입구를 서성이며 몇 시간째 오지 않는 헛것의 그림자를 두리번거리기도 했지, 그날 멀건 찌개그릇 놓인 북아현동 막걸리집 낡은 식탁에는 담뱃재가 눈처럼 내렸고, 골목을 돌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손님 없는 구멍가게가 졸고 있었고, 그 옆에 보안등을 켠 전봇대는 어린 연인에게서 짐짓 고개를 돌렸지,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선 공터에는 순한 짐승의 내장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는 남자들의 기착지가 있었는데, 밤이 참 푸르렀는데, 구주절절 몇 곡 꺾고 보니 아무래도 나이를 먹지 않을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 어디서 다시 새날이 밝아온다는 것이다

 

 

 


# 조항록 시인은 1967년 서울 출생으로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92년 <문학정신>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지나가나 슬픔>, <근황>, <거룩한 그물>, <여기 아닌 곳>, <눈 한번 감았다 뜰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