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저녁의 소리 - 손택수

저녁의 소리 - 손택수 종소리는 내겐 시장기 같은 것, 담벼락이나 슬레이트 지붕 위에 올라가 고양이처럼 오도마니 웅크려 앉은 저물녘이면 피어나는 분꽃과 함께 어린 뱃속에서 칭얼대며 올라오던 소리와도 같은 것, 그 굴풋한 소리를 그리워하며 살게 될 줄 어찌 알았을까만 야채트럭의 마이크 소리가 골목을 돌고, 저문 여울 속에서 배를 뒤집는 피라미떼처럼 반짝이는 새소리가 살아나고, 담벼락 위에 사다리를 걸치고 올라간 옆집 누나의 종아리, 종아리처럼 하얀 물줄기가 찰, 찰, 찰 화단에 떨어지는 소리도 들려오고 어쩌면 먼지 풀풀 날리는 소음으로나 그쳤을 이 많은 소리들을 종소리는 내게 주고 간 것이 아닌지 그 소리들도 멀어지는 종소리를 듣기 위해 가만히 멈춰서 있었던 것이나 아닌지 찬장에 엎어놓은 밥그릇처럼 저녁 ..

한줄 詩 2020.08.29

불시착 - 우남정

불시착 - 우남정 빈방에 하나의 침대와 비어 있는 의자가 비행운을 그린다 살비듬 핀 절벽에 검버섯이 말라붙어 있다 발끝에서 푸르스름한 바람이 올라온다 심박기의 그래프가 잦아드는 숨을 그리고 있다 검지를 물고 있는 감지기가 급히 우주로 심박을 타전한다 서둘러 온 창밖의 달빛이 교신할 듯 벌어진 입 언저리를 맴돌고 있다 호스피스 병동의 차고 푸른 적막 속으로 구조를 기다리는 흰그림자들이 일렁인다 다급하게 방문이 열리고 몇 억 광년 전 어느 별빛이 막 당도했는지 파랑 하나가 직선을 끌고 간다 계기판은 제로선을 그으며 찌- 무한이 돌아오고 있다 어머니! 마지막까지 떠나지 못하던 귀가 알아듣고 감은 눈에서 가만히 투명한 캡슐 하나가 흘러나온다 *시집/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저녁이 오고 있다/ 문학의전당 풀물이 드..

한줄 詩 2020.08.28

모로 누운 당신 - 황형철

모로 누운 당신 - 황형철 이 소란이 잠잠해지고 말면 더욱 희미한 호흡으로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 이승의 숨으로는 갈 수 없는 가파른 길을 두고 돌아설 수밖에 없는 나는 모로 누운 당신의 두 손을 잡고 이별의 언저리를 서성이는데 소슬히 어스름이 깔리는 저녁을 뚫고 강물처럼 잔잔한 당신의 착하고 순했던 평생이 밀려온다 딴전 한번 없이 예까지 온 생애도 측은한데 당신의 끝은 설움에 젖어 야위었고 우리가 건너야 할 서로 다른 벼랑을 보며 행여 들킬까 꾹꾹 울음을 누른다 나의 무엇을 당신에게 지녀줄 것인가 당신의 무엇을 나는 지닐 것인가 바람도 파랑도 없이 내 전부를 흔드는 당신 *시집/ 사이도 좋게 딱/ 걷는사람 뒤 - 황형철 내 뒷모습은 나 자신의 절반인 것인데 사이도 좋게 딱 반반씩 나눈 것인..

한줄 詩 2020.08.28

소통 - 김호진

소통 - 김호진 늙은 친정엄마와 함께 딸이 약국에 들어선다 약 안 먹겠다는 노모에게 엄마, 약 그렇게 묵기 싫으마, 그만 죽어뿌라, 그게 편타~~ 내가 양지바른 데 잘 묻어 주께~~ 天氣의 창을 여닫는 장엄한 소리에 약국문틀이 움칫 흔들렸는데, 노모의 대답, 간결한 섬광처럼 틈을 메운다 망할 년! 그러고는 히죽히죽 웃는다 딸도 흐트러진 노모의 옷매무새를 매만지며 따라 히죽댄다 완벽한 소통! 내가 우주에서 꿈꿔온.... *시집/ 아흐레는 지나서 와야겠다/ 시와반시 이분연 - 김호진 장날 시골약국은 식전부터 소란하다 경상도에서 고함소리는 반가울 때 입는 정장옷 차림이다 버스시간 급해~, 내 약 먼저 줘~, 외치는 할머니의 목청은 명절 갓 쪄낸 가래떡처럼 찰지다 그러기에 쏟아지는 눈총은 아예 파장의 채솟값보다..

한줄 詩 2020.08.27

연장론 - 이서화​

연장론 - 이서화​ 손을 놀려야 먹고산다고 말한 사람은 몇 년째 손을 놀리고 있다 펜치며 연장들의 앙다문 입으로 녹이 눌어붙어 있다 잔뜩 오므린 채 떼어도 펴지지 않는 식음 전폐다​ 몇 년 무소식 끝에 집수리 부탁하려 찾아간 김 씨의 사정은 사람도 기술도 그 수족도 폐업이다 수많은 연장들의 수장이었던 사람은 밥보다 알약을 더 많이 먹는다 그나마 열리는 입에선 흔들리고 떠는 말들뿐이다​ 돌아오는 길, 봄은 또 연장들도 없이 나무마다 달라붙어 꽃 피는 공사 중이다 고장 난 우리 집 수도 파이프는 어느 봄의 독촉으로 졸졸 새고 있는가 꽉 다문 연장들의 입을 어떤 봄의 입김으로 녹여야 하나 *시집/ 낮달이 허락도 없이/ 천년의시작 집밥 - 이서화 둥그런 양은 밥상에서 후일을 도모하던 칠 벗겨진 봉황이 생각난다 ..

한줄 詩 2020.08.27

몸의 작은 틈으로 - 김윤배

몸의 작은 틈으로 - 김윤배 ​ 언젠가, 건너기 위해 토함산의 일출쯤이면, 개마고원의 낙조쯤이면 어떨까 텐산의 봄빛쯤이면, 타클라마칸의 겨울쯤이면 어떨까 건넌 후, 서러워지면 몸의 작은 틈으로 펼쳐지는 미답의 생애는 적막한가 홀로 채색에 이르는 야생화, 그 꽃말들을 접으며 상실을 떠올렸다 상실 뒤에 많은 달빛의 빗장이 있다는 걸 터키식 커피 점괘로 알았다 어둠 깊어 커다란 별들이 호수를 이룬다 호수의 물결이 설렘이란 걸 깨닫고 나면 뒤에 남겨진 것은 밤하늘에 안긴 벗은 달몸이었다 무거운 속눈썹에 밤이슬 내리고 지상에서의 숨결은 다시 아프다 *시집/ 마침내, 네가 비밀이 되었다/ 휴먼앤북스 파문 후의 꽃고비꽃 - 김윤배 군락을 이룬 꽃들 북쪽으로 쓰러지다/파문의 시작인 것 파문을 맞다/돌이킬 수 없는, 길..

한줄 詩 2020.08.23

처서(處暑) - 류정환

처서(處暑) - 류정환 꽃피던 날들이 언제였던가, 뜨겁던 여름날도 어느새 다 지나갔구나, 바람이 벌써 어제하고 다르네, 중얼거리며 쓸쓸한 기운을 털어내는 아침 놀랍게도, 밥상머리에 앉은 아들이 대꾸를 한다. "오늘이 처서잖아요." "니가 처서를 다 알아?" "모기 입이 돌아간다는...." 올여름엔 구경도 못 한 모기까지 들먹이다니 제법이다. 땅에선 귀뚜라미 등에 업혀 오고 하늘에선 뭉게구름 타고 온다더니 올해 처서는 갓 스무 살 지난 아들의 말끝에 묻어서 왔다. 좋은 날이다, 꽃피는 시절은 지나간 게 아니라 아들놈 얼굴로 옮겨간 거로구나! 입춘. 청명, 하지, 처서, 모든 날들은 한 밥상에 뒤엉켜 있는 거로구나! 천기(天氣)가 크게 바뀌는 때. 쉰다섯의 또 한 절기를 돌아가며 여름의 뒷모습처럼 꽁지가 허..

한줄 詩 2020.08.23

불과, 혹은 - 정훈교

불과, 혹은 - 정훈교 몇 번의 침묵이 흘렀다 ​ 마흔 또는 그 고비에 이르러 죽은 그림자를 낙타는 부둥켜안았다 강으로 떠내려간 이름과 흰 벽을 타고 오른 이름과 초성 두어 개 떨어져 나간 녹슨 이름을 부둥켜안고, 그가 들어섰다 ​ 모두가 바람벽이라고 한, 그 몇 해 동안 그는, 녹슨 이름을 훈장처럼 부둥켜안고, 살았다. ​ 그 누구도 그의 이름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발설해서도 안 되는 것이었고, 잊어서도 안 되는 이름이었다, 극성이 유난히 빛나는 삼경(三更)에도 그의 이름은, 암호처럼 어두웠다 그는 겨울 동백을 아들처럼 품고, 살았다, 산 자는 말이 없었고 죽은 자는 역사로 살아있음을 증명해야 했다 낙타는 빈 들판에 서서 다리가 잘려 나간 이름 몇 개를 태웠다 그리고,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

한줄 詩 2020.08.21

분꽃 - 김말화

분꽃 - 김말화 머리카락이 희끗해지도록 기억할 만한 행복 하나 변변히 없는 여자 등 뒤로 바람이 지나가고 생각난 듯 분꽃이 피었다 한번도 행복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취산(聚散)의 땅에 앉아 묵묵히 꽃을 피워내고 뿌리로 사는 것, 행복이라 여겼다 튼실해진 가지들 사이에서 가끔 중얼거리듯 노래 할 뿐 손발이 터지도록 거름이 되고 울타리가 돼주었다 마당에 분꽃 앞 다투어 피던 날 꽃 아래 퍼질러 앉아 울던 여자 그녀를 지키려다 눈두덩이 시커멓게 부풀어 오른 나도 까만 눈물을 떨구었다 올해도 저렇게 분꽃이 피었구나 울어야 할 일이 또 있기라도 하듯 *시집/ 차차차 꽃잎들/ 애지출판 쑥부쟁이 - 김말화 야야 성욕은 참아도 식욕은 못 참는데이 감동이 가슴으로 오면 예술이지마는 아랫도리로 오면 외설 아이가 내사마 주..

한줄 詩 2020.08.20

서른의 방학 - 류성훈

서른의 방학 - 류성훈 당연한 듯 걷다, 줄어든 팔뚝을 슬쩍 잡을 때, 미열이 건너온다 매번 채워야 하는 내 배가 번거롭고 안도,라는 단어가 문득 생각나지 않을 때 젊은 구름들에게도 미소한 끝들이 있어 식은 그릇 같은 저녁을 골목 어귀에 두고 두꺼워짐에 서투른, 제 몸 나이테 어디쯤 넋을 태우는지 모르는 나무들이 깨끗한 발과 함께 멈춘다 닳을 일 없어 너와 네 헛된 옷깃을 부검하듯 살아 더 눈부신 목소릴 자꾸 긁는다 바지 뒷단이 끌리기 시작할 때 터진 종량제 봉투처럼 쏟아지는 저층운을 볼 수 있을 때, 녹이 앉은 줄만 괜히 뚱겨 보다 어스름 뒤편에 얇은 이불을 펼 때 오늘의 예보는 어떤 국지성 호우도 적중한다 앞으론 착하게 살지 않겠다고, 모든 허기가 따뜻한 우유처럼 목을 넘어가기를, 새벽 세 시의 쓰레..

한줄 詩 2020.08.20